(5) <레나드·모슬리 <LEONARD」MOSLEY>>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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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천황은 참석자들의 발언이 끝난 다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9일 밤의 어전 회의때와는 달리 여유 있고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포츠담」선언수락 반대의견은 잘 들었는데 내 생각은 9일 밤과 다름이 없다.
세계정세와 국내사정을 충분히 검토한 결과 이상 더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차제에 저쪽제안을 수락해도 좋다고 본다.
참석자 일동도 부디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란다.
국체보존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이 있다고 하나 연합국회답문을 보건대 저편은 평화적이며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다.
국민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좋다면 언제든지 방송「마이크」앞에 서겠다.
부디 내 심정을 십분 이해하여 육·해군 대신은 함께 힘을 합해서 일이 잘 수습되도록 부탁한다.
「칙서」를 낼 필요도 있을 터이니 내각은 곧 기안해 주기를 바란다.』
천황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리를 내며 엉엉 우는 사람도 있었다.
천황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번에는 감히 누구도 종전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틀림없이 전쟁은 끝난 것이다.
항복결정이 내린 이상 제일먼저「칙서」를 발포하여 국민에게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칙서내용이 온 국민에게 골고루 알려질 수 있는 방법으로서 목호 내부는「라디오」방송이 가장 좋다는 것을 천황에게 말씀드렸다. 천황이 직접「마이크」앞에 서는 것이다. 이런 일은 소위 만세일계라는 일본황실사를 통해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히로히도」는「라디오」방송에 곧 동의하였다.
8월14일 정오 조금전에 천황은 궁내성으로 가서 국민에게「포츠담」선언수락을 알리는 방송녹음 작성에 착수하였다. 「칙서」는 내각에서 만든 것이었으나 그 속에는 9일과 14일의 어전회의 때의 천황발언이 많이 담겨졌다. 녹음할 때 기술자들은 천황이「마이크」에 서 본적이 없기 때문에 잔잔한 목소리로 국민에 대해 연설하는 양하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단한번으로 훌륭한 녹음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녹음이 실제로 국민의 귀에 들어가기까지는 또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소란을 겪어야했다. 천황이 종전칙서를 녹음해서 그 이튿날 전국에 방송한다는 소문은 강경파의 소장장교들 귀에도 들어갔다. 이들은 칙서방송을 방해하고자 결심했다. 전중소좌·상원대위 등은 근위사단사령부에 몰려가 삼사단장에게 궐기를 호소했으나 이를 거부하자 사단장을 사살했다.
이자들은 위조사단장명령??에 삼중장의 도장을 짹어 휘하부대에 하달, 사단을 동원했다. 이들 반란부대는 궁내성 으로 밀어닥쳐 녹음반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반란부대는 궁성으로부터 외부로 통하는 모든 전화선을 차단한 셈으로 있었지만 해군참모본부로 통하는 한 개선만은 무사한 것을 까맣게 모르고있었다. 이선을 통해 외부세계에 구원을 청했다. 반란장교들이 녹음판을 찾으려고 여기저기를 뒤지고 있는 동안 전 중동부군관구사령관이 궁성으로 달려왔다.
전중사령관은 반란장교들이 천황을 모독했다고 호되게 나무랐다. 사태가 이쯤되자 반란장교들은 그들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깨닫고 궁성앞 광장으로 가서 자결하였다. 그후 아남육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장군·제독·장교들이 할복자살하였다.
8월15일 정오1분전, 일본국민은 「라디오」앞에 모여 귀를 기울였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 황공한 마음으로 소위 천조대신 후예의 옥음을 기다렸다.
12시 정각 드디어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계대세와 황국의 현 시국을 수습하려고, 이에 충량한 국민에게 알린다. 짐(천황)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해 그들의 공동선언을 수락한다고 통고케 했다….』
칙서는 퍽 긴 것이었다. 더러는 뜻이 잘 통하지 않는 구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것만은 모두가 알수 있었다. (계속) <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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