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북해도의 한국인|징용자 12만…후예들의 사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일 합병시부터 단기 4278년8월15일 광복절에 이르는 장기간, 원거리 한국으로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 징용 또는 노무자로서 내도하여….>

<민단계 3천5백>
일본의 북단 「혹가이도」 (북해도) 「삿보로」 (찰황) 동북방 4킬로의 「데이네야마」 기슭에 세워진 「한국인순난자지위령비」 첫머리에 적혀 있는데 군사 징용으로 끌려갔던 한국인은 총 12만5천명-. 현재 북해도 각처에 흩어져 사는 재일 교포 약 9천5백명 (민단계=3천5백명)은 그 후예들이다.
탄광 광산 토목 사업장에서 모진 노무에 심신이 지쳐 병고에 신음하다 숨진 사람, 위험률 높은 일터에서 비운의 재난에 절명한 사람, 일본 관헌의 채찍질에 못 이겨 도망치다 비명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수효는 약 3만4천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태평양전쟁 종결 후 북해도 교포들은 당시의 도 민원 원장 남원씨 (현 북해도 한국 학원 원장) 중심으로 도 당국에 교섭하여 수도산 기슭 「평화의 폭포」 곁의 땅 5백평을 불하 받고 멀리 「센다이」에서 청석을 끌어와 민족 수난의 상징인 1960년의 6월25일을 택일하여 「위령비」를 세웠다.

<3백일 승이 위령제>
매년 6, 8, 10월의 5일 세 차례 위령제가 치러지는데, 지난 6월5일 제터에 갔던 송찬호 찰황 총영사는 「기묘한 제사」 광경에 깜짝 놀랐다. 「백의」의 옷차림은 거의 보이지 않고 일본 중 약 3백명이 무릎을 꿇고 염불을 올리고 있었다. 위령비는 세워졌으나 수월치 않은 제사 비용에 시달려 제사를 대신 치른다는 조건 아래 비 터 5백평을 근처의 일본의 불사에「기부」했다는 것이다.
한국인 순난자를 위해 염불을 읊는 일본 중들- 야룻한 감회를 자아내게 하는 광경이었다.

<편견 없는 세대로>
「세계는 하나다. 우리들 어린이가 국제 친선의 선두에 서보자」-「노보리베쯔」 정립경별 중학교 2학년 2조 생도들이 한국과의 친선 교류 계획에 착수한 것은 지난 5월초 일본 각지에서 등별 고을에 이르는 지도와 사진을 곁들인 설명, 일본의 풍속, 습관을 담은 그림, 북해도 각지의 그림엽서, 게다가 변함없는 우정을 상징하는 「천우학」을 갖추어 가까이 주찰황 총영사관을 통하여 한국의 중학교에 전할 차비를 차리고 있다. 한국인의 벗과 문통을 하고 있고 이번 교류 계획의 산파역을 맡은 담당 국지정아교사 (25)는 『어린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살려주고 싶다. 이들 어린이의 넓은 마음씨가 어른들이 못 다할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선입감 없는 새 세대의 마음씨가 바로 한·일 친선의 「밑거름」이 아닐는지?

<고생하는 실습생>
l964년3월 한국의 농업 실습생 10명이 북해도에 건너와 일본 농가에 분산되어 전작이며 축산의 기술을 「실습」했다. 5·16이후 북해도를 시찰했던 유달영씨 (당시 재건국민운동본부장)가 착안하여 당시의 도 민원 원장 박준용씨의 개인적인 협조로 이루어졌던 것. 계속해서 경기도와 북해도 도청 사이에 교섭이 이루어져 곧 낙농 실습생 20명이 건너오게 되어있다. 북해도 「실습생에는 문제가 많은 것 같다. 매달 5천원 정도의 용돈을 받고 일본 농부와 함께 새벽 4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에 쫓기다 보니까 『우리는 공부를 하러 왔는데 이건 품삯도 안 되는 품팔이가 아니냐』는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게 됐다.

<밍크 사육 8년째>
북해도의 현관 「지또세」 공항에 가까운 「미미」에서 김백원씨 (58·평남 성천 출신)는 모피의 왕 「밍크」를 7천 마리나 사육하고 있다. 연간 생산은 값으로 따져 10만「달러」, 그중 절반을 미국과 「캐나다」에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고 했다.
종업원 12명을 거느리고 「밍크」사육 8년째라는 김씨는 5·16이후 「교포 재산 반입」으로 업체를 한국에 옮기려다 이루지 못했다.
일 여인 자부는 8년 전 한국인으로 귀화한 백인 귀화 제1호라고. 【찰황=강범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