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미래가 보이는 마당] 글로컬리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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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이나 월드컵은 글로벌리즘의 모델이고 보신탕은 로컬리즘의 상징이다. 월드컵과 보신탕 사이에 낀 한국인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글로벌리즘이냐 로컬리즘이냐 하는 이자택일의 선택지를 넘어서 '글로컬리즘'의 통합적인 장을 마련하는 문화읽기와 문화만들기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도 그 가깝고 먼 거리를 재는 잣대에 따라서 애완동물과 가축과 야생동물을 나누는 경계에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개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서양의 문화 코드로 보면 개는 인간과 거의 동일시된다. 그러나 질서를 중시하는 유교권 문화에서는 아무리 가까워도 인간과 개는 유별하다.

문화 코드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축구를 즐기는 것이 개고기를 먹는 것보다 더 야만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여러 스포츠 가운데 유독 축구만이 손을 쓰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손은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문명의 상징이 아닌가. 그리고 다 큰 어른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한사람(골 키퍼)을 괴롭히는 것도 잔학한 짓이 아닌가.

대만으로 후퇴해 온 국부군(國府軍)들은 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져 나오는 수도를 보고 놀랐다. 군인들은 신기한 그 수도꼭지를 사다가는 벽마다 박아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틀어도 물은 한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속았다고 생각한 군인들은 철물점으로 쳐들어가 총질을 하며 난동을 부렸다. 우스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역시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다가 그런 소동을 벌이는 수가 많다. 사람들은 땅 속의 수도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전구를 처음 발명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누구나가 에디슨이라고 쉽게 말한다.

일본 아이들이라면 그 전구에 쓴 대나무가 일본산이었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그런데 막상 전구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한 발전소와 그 송전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 같은 에디슨이 한 일인데도 말이다.

월 드컵의 개고기 소동도 마찬가지다. 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개고기를 먹는 행위를 중단시키라고 요구했고 한국 조직위원회는 "FIFA가 관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거부했다.

"왜 생선을 산 채로 회를 떠서 먹는 일본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는가? 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에는 말고기, 달팽이, 개구리 뒷다리 요리를 먹지 못하도록 조처하지 않았는가? 2008년 베이징(北京) 올림픽 기간에도 개고기를 먹는 13억 중국인을 향해 식단을 바꾸라고 말할 용기가 있는가"-한국인이라면 어느 외지의 논평처럼 그렇게 항의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응수로는 FIFA의 월권이나 약자 때리기의 비판은 될지언정 개고기를 먹는 해명이나 정당화가 될 수는 없다. 교통법규를 위반한 운전자가 "당신에겐 단속 권한이 없다"라고 하거나, "왜 다른 차는 놔두고 나만 잡느냐"고 따지는 것과 비슷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잘못하다가는 수도꼭지 소동 같은 개싸움이 되고 만다. 이미 워너 브러더스 방송사와 뉴욕의 한인 사회 사이에서는 그런 분규가 일어나고 있다.

"한인 가게에서 개고기가 유통되고 있다"는 보도에 대하여 한국인 당사자는 그것이 개고기가 아니라 미국인도 먹는 코요테(여우와 비슷한 개과 동물)고기였으며 보신탕이 아니라 염소 보신 전골이었다고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왜곡보도라는 것이 밝혀진다 해도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의 식문화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서양 사람들이 있는 한 "창피해서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한국인 2세들의 고민은 가시지 않는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은 글로벌리즘의 모델이고 보신탕은 로컬리즘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그 잡음의 배경에는 문화 보편주의 대 문화 상대주의라는 거대 담론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이 개를 물다"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을 고발한 워너 브러더스는 서구문화를 월드시스템으로 삼고 있는 문화 보편주의의 창이다.

이에 비해 '한국인들은 월드컵 때문에 진미 요리를 포기해야 하는가'라고 묻고 "지금 한국에서는 남의 고유한 음식문화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에 대하여 서구의 문화 제국주의라는 반감이 확산되고 있다"고 논평 한 독일의 알게마이네 차이퉁지는 문화 상대주의의 방패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가 먹고 난 보신탕 그릇을 어떤 논리, 어떤 태도로 설거지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세계화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적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월드컵과 보신탕 사이에 낀 한국인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글로벌리즘이냐 로컬리즘이냐 하는 이자택일의 선택지를 넘어서 '글로컬리즘'의 통합적인 장을 마련하는 문화읽기와 문화만들기이다. 개는 2,3만년 전 크로마뇽인 시절부터 인간과 가장 가깝게 지내온 동물이다. 폼페이의 유적 발굴에서도 어린아이들을 보호하려다가 죽은 것으로 보이는 개의 유해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과 개가 함께 살아온 인류문화의 텃밭에서부터 서로 얽힌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의 지명에는 개와 관련된 것이 무려 2천4백14개나 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는 술에 취한 주인을 산불에서 구하려다 숨진 의견(義犬)의 전설을 딴 '개목 고개'라는 것도 있다. 우선 이러한 정보를 세계의 이웃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그리고 정보에서 지식으로 단계를 높여 구조주의자들처럼 식문화에 숨어 있는 문화 코드를 찾아내 분석해야만 한다.

결혼과 식문화의 심층에는 "해가 너무 가까이 있으면 타죽고 너무 멀리 있으면 얼어 죽는다"는 원근금기(禁忌) 의식이 숨어 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끼리 하는 근친혼도, 이방인과 하는 외혼도 기피하는 것처럼 인간은 가까이에 있는 애완동물도 멀리 있는 야수(野獸)도 다같이 먹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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