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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모르는 잘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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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부부싸움이나 연인 간의 싸움에서 남자들이 곧잘 하는 말이다. 의도와 달리 이런 말은 여자들의 화를 달래기는커녕 부추기는 경우가 많다. 뭉뚱그려 ‘다’ 잘못했다는 대목 때문이다. 잘못된 행동을 고치겠다는 반성 대신 당장의 갈등을 모면하려는 거짓 사과로 들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대개 이렇게 받아친다. “잘못했다고? 그럼 뭘 어떻게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봐.”

 남녀관계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 최근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과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의 단독 인터뷰를 지켜본 미국 시청자들도 그랬던 모양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암스트롱은 암을 이겨내고 투르 드 프랑스에서 7연패의 대기록을 이룬 인간 승리의 상징이었다. 지난해 가을 미국 반도핑 기구가 그의 약물 복용 혐의를 뒷받침하는 보고서를 발표하기 전까지 말이다. 암스트롱은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사기꾼으로 전락했고, 화려한 기록은 박탈됐다. 이런 마당이라 그의 인터뷰는 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이틀에 걸쳐 2부로 편성된 인터뷰는 1부 방송 직후부터 실망스럽다는 평을 들었다. 영웅에게 큰 사랑을 퍼부었다가 숨은 거짓에 배신감을 느낀 이들을 달래기에 미흡했단 얘기다.

 국내 채널에서 한글자막을 입혀 방송한 인터뷰를 보니 그런 반응이 나올 만했다. 암스트롱은 약물 복용, 자가 수혈 등 경기력 향상을 위해 부정행위를 한 사실을 자기 입으로 처음 인정했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장기간 어떻게 이뤄졌는지, 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구체적 설명은 생략했다. 진심으로 뉘우친다는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과 역시 인색했다. 앞서 그의 부정행위를 증언했던 팀 관계자나 동료 선수의 가족을 몹쓸 말로 가혹하게 공격했던 것과, 심지어 투르 드 프랑스 7연패 직후 ‘사람들이 기적을 믿지 않는다’는 말까지 동원해 자신에 대한 의혹에 쓴소리를 날렸던 것과는 딴판이다.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부정행위를 거듭할 당시 죄의식에 벌벌 떨지는 않았다. 잘못된 일이라는 걸, 속임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느꼈냐는 질문에 차례로 ‘아니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무서운 일’ ‘더 무서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잘못이라는 걸 못 느낀 게 무섭다는 의미다. 누구보다도 강철 같은 의지와 근육을 지닌 남자 암스트롱이 그 순간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아이들이 사고를 치고 울음을 터뜨리는 건 죄의식이나 죄책감을 느껴서가 아니다. 어른들이 목청을 높이는 당장의 상황 자체가 당혹스럽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행동의 대가로 한바탕 훈계를 듣거나 벌을 서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도덕률을 학습한다. 예전에 암스트롱은 ‘고통은 순간’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제 그의 고통은 꽤 오래갈 것 같다. 잘못이 뭔지 뒤늦게 알기 시작한 어른의 비극이다.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