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어느 행복한 여자의 하루 이 세상에 공짜 행복은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코끝이 시려 밤새 뒤척이다가 잠을 설쳤다. 그럭저럭 몸 컨디션이 괜찮은 걸 보니 그래도 잠을 잘 만큼은 잔 모양이다. 창을 통해 보이는 익숙한 그림. 어릴 적 마분지 접어 크리스마스 카드 만들 때 크레용 꾹꾹 눌러 그리던 촌스러운 풍경이다. 하늘 저편에서 하얀 쌀가루 같은 것이 솔솔 떨어진다. 또 눈이다. 엄마가 백설기 만드실 때도 저랬다. 난, 떡 중에 백설기가 제일 싫다.

 한기가 느껴져 보일러 온도를 높이는데. 아차. 보일러 기름. 기름 눈금이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남았다. 주문 전화를 걸었다. 비가 언 상태에서 눈이 쌓여 이곳 꼭대기까지는 배달이 어렵겠단다. ‘그럼 전 어떻게 해요?’ 무식하게 물으니 이성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기름이 아주 동나면 보일러 관이 터져요. 아끼고 참으셨다가 날 풀리면 넣으세요.’

 ‘오 마이 갓’. 하지만 방법은 있단다. 커다란 생수통 두 통의 기름을 채우면 이삼 일은 견딜 거라며 큰길가로 나와서 가지고 올라가란다. 사람도 오르내리기 미끄러운 언덕을 커다란 생수통 두 개를 핸드카트로?

 눈이 더 쌓이기 전 넣으라기에, 서둘러 내려갈 준비를 했다. 입기만 하면 눈사람으로 둔갑하는 옷과 장갑과 모자와 털장화 그리고 핸드카트까지. ‘흰 눈 사이로 카트를 밀고’ 큰길가로 내려가는데. 완전 ‘몸개그’했다.

 벌써 도착해 대기 중이던 주유소 차 창문에 비친 내 모습. 가관이다. ‘저, 꽃거지 같죠?’ 이 상황에도 농담이 나온다. 모자라는 건가, 대범한 건가. 아저씨는 웃지도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번 차로 올라가 봅시다.’ 뒤뚱대며 올라가는 기름 탱크차. 뒤따라가면서 어찌나 맘을 졸였던지. 결국 눈길 운전의 달인, 아저씨 덕에 기름 빵빵하게 넣고 한숨 돌렸다. 높은 언덕 위에 있어 오가는 사람 없고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집.

 인물 좋은 사람, 인물값 한다더니 꼭 그 꼴이다. 높은 언덕 덕분에 눈 오면 이 고생이고, 사람 발길이 뜸해서 무섭고, 공기가 좋은 만큼 바람은 더 쌀쌀하고, 좋은 경치 바라보는 재미에 움직이지 않고 창문에만 붙어 앉아있어서 운동 안 해 살은 더 찌고. 자장면 배달은커녕 외진 곳에 있다고 신문배달도 하루 건너 떼먹기 일쑤고. 하긴. 혀가 즐기는 자극적인 음식은 몸이 싫어하고, 착한 사람은 말초적 매력이 덜하고, 성격 좋아 친구 많은 사람은 나만의 친구 되기 힘들고. 이 세상에 다 좋은 건 없구나.

 『희망이 외롭다』란 시집에서 김승희님은 ‘꽃들이 반짝반짝했는데… 그 자리에 가을이 앉아있다’라 하던데. 아름다운 풍경 뒤에 이런 모진 일이 똬리를 틀고 있을 줄 몰랐다. 반짝이던 꽃잎 자리에 앉은 가을이, 결실이란 희망이 되듯이. 이런 모진 일도 겸손의 씨앗이 되려나. 공짜 행복은 없나 보다.

글=엄을순 객원칼럼니스트
사진=김회룡 기자

▶ [분수대] 더 보기
▶ [한·영 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