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란 어머니 "내 딸이 밝히지 못한 사연"

중앙일보

입력

이태란 어머니 황경순씨는 사건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곤 한다. 젊디젊은 딸의 앞날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전세금조차 매니저 안씨에게 사기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딸이 차마 밝히지 못했던 그간의 사연들을 털어놓습니다”

이태란의 어머니 황혜순씨(가명)는 최근 한 달여 동안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멍하니 컴컴한 천장을 쳐다보다 딸 방에 슬그머니 들어가 축축이 젖어 있는 딸의 베개를 만져보곤 했다.

이불깃을 덮어주며 애써 울음을 삼킨 적도 여러 번.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까지 뒤척이던 딸은 엄마의 손길을 느끼고 속으로 삼키던 울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토해냈다. 그러면 ‘딸 앞에서 다시는 울지 않아야겠다’는 황씨의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모녀는 부둥켜안은 채 눈물 바다를 이루곤 했다.

여자 연예인으로서는 ‘생명’이나 다름없는 매니저와의 성관계 사실을 인정하고 매니저를 고소하기까지, 이태란과 어머니 황씨의 고통은 세상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이태란은 “연예계를 떠나 식당에서 그릇을 닦으며 사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 매니저의 협박과 횡포를 참을 수 없다”며 지난 9월 17일 매니저 안씨(40)를 고소했다.

이날 이후 이태란과 그의 어머니 황씨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이태란은 방송이 있어 억지로라도 움직였지만 어머니는 그대로 몸져눕고 말았다.

이태란은 그런 어머니를 위로하고 황씨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딸을 위로하면서 밤마다 ‘이 어려운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거친 사막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외로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태란이 “지난 일을 잊고 연예활동에만 전념하겠다”고 의욕을 보였지만, 섹스비디오 존재 유무를 둘러싼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호기심에 가득 찬 세상 사람들이 상처 난 곳을 송곳으로 후벼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태란이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CF가 중단되고 방송가에서 느닷없이 드라마 퇴출설까지 나돌아 연기생활의 위기와 함께 생활고까지 겪고 있다.

이태란이 살고 있는 경기도 일산의 집을 찾을 때마다 그의 어머니 황경순씨는 “미안해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문전박대를 하는 것 같지만 제발 지금의 제 심정을 헤아려주세요”라고 말하며 조용히 문을 닫곤 했다.

“기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통에 밤에도 불을 켜지 못한 채 캄캄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날이 허다했다”며 극도로 언론과의 접촉을 꺼렸던 어머니는 기자가 수차례 집으로 찾아가 접촉을 시도한 끝에 결국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10월 15일 오후 2시. 이태란의 집에서 만나기로 한 어머니는 약속시간 직전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 “급한 일이 생겨 약속시간을 저녁으로 옮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 저녁 늦은 시간 직접 집으로 찾아갔지만 불은 꺼져 있었다. 인터뷰 약속 때 알려준 휴대폰으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야 어머니는 맥이 풀린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세상에 (매니저에게) 집까지 사기를 당했네요. 이럴 수가 있어요? 지금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날씨도 추워지는데 살 집마저 없이 길거리로 나앉게 생겼어요. 계약기간은 남았지만 전세금을 빼서 우선 다급한 빚을 갚아야겠다고 맘먹고 집주인을 찾아갔어요. 집 문제를 상의하는데 집주인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하는 겁니다.

전세가 아니라 월세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었어요. ‘전세가 아닌 월세로 살고 있다니요?’라고 물으니 월세계약서를 보여줍디다. 제가 들고 간 전세계약서는 매니저가 위조한 것이었어요.”

어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설마 전세금까지 사기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단다. 이것은 경찰 수사 과정에서도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다.

“저도 오늘 집주인을 만나보고서야 이걸 알았어요. 지난 한 달 동안 다른 부채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태란이와 큰딸을 데리고 오후 내내 집주인을 찾아 나섰어요.

저녁 늦게서야 물어물어 집주인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갔는데 집주인한테 날벼락 같은 얘기를 들은 겁니다. 셋이서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요. 너무 기가 막히니까 눈물도 안 나오데요”라고 하면서 “본의 아니게 오늘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며 다음에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때는 사위로까지 생각했던 매니저 안씨 전세금까지 사기쳤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해

그리고 곧바로 다음날 어머니는 마음을 가다듬고 긴 시간 동안 참담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마지막으로 믿는 구석은 전세금뿐이었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데요. 그 사람은 태란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기를 치려고 작정을 했던 모양이에요. 철저하게 계획적이었다는 걸 이제서야 알았네요. 이 집을 얻은 게 2년 10개월 전인 98년이었거든요. 태란이의 매니저 일을 보기 시작한 때였죠.

전세금까지 사기당한 줄도 모르고 딸과 나는 구치소에 들어간 그 사람을 위해 ‘새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기도를 드렸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제는 더 이상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할 수가 없네요.” 기가 막힌 듯 황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태란이 아는 사람을 통해 안씨를 만난 것은 1998년 초였다. 당시 이태란이 전 매니저와 이중계약으로 인한 문제에 부딪혀 힘들어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안씨가 나서서 이태란에게 일이 잘 해결되도록 조언을 해줬고, 그 일을 계기로 안씨는 같은 해 8월 이태란의 매니저로 일하기 시작했다.

“서울 제기동에 살고 있을 때 큰딸 주명이가 ‘태란이가 방송국과 멀어 힘들다며 일산으로 이사를 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묻더라고요. 처음에는 ‘가족들이 오랫동안 다니던 교회를 옮길 수 없으니 그냥 이곳에서 살자’고 했지만 태란이를 생각해서 제가 맘을 바꿔 먹었죠. 일산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하고 집을 알아보려고 하는데 당시 태란이 매니저 일을 맡기 시작한 그 사람이 ‘어머니는 일산 지리도 잘 모르시니까 자기가 대신 집을 알아보겠다’고 하더라고요.”

매니저 안씨가 대신 집을 구했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부동산에 같이 가서 계약을 하자”고 말하자 안씨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켰다고 한다. 어머니가 안씨에게 건넨 전세금은 7천만원. 그동안 식당 등을 운영하며 어렵게 모은 것으로 가족에겐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이었다.

“뒤에 계약서를 받아보니까 제 이름 끝자가 틀리게 적혀 있더라고요. ‘ㅖ’가 ‘ㅐ’로 되어 있어 계약서를 다시 써야 되지 않겠냐고 했더니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계약서상의 내 이름을 정확히 하고 싶어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더니 얼마 후에 매니저 안씨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와 ‘어머니는 날 그렇게 못 믿느냐’고 막 화를 냈어요.”

임대 계약기간이 끝날 무렵인 지난해 12월, 안씨는 이태란의 어머니에게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한다”면서 3천만원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안씨에게 3천만원을 건네기 전에 “이번에는 직접 집주인을 만나서 계약을 갱신하겠다”고 나섰다.

“안씨가 부동산으로 ‘집주인’이라는 사람과 함께 왔더라고요. 재계약을 맺기 전에 주인이 ‘집을 얼마나 깨끗이 썼는지 보고 싶다’고 하기에 직접 집으로 데리고 갔죠. 그 사람이 ‘집을 참 깨끗이 써서 고맙다’고 하면서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다시 부동산에 가서 재계약서를 썼어요.

지금 보니 재계약을 할 때 매니저가 데리고 온 사람은 가짜 집주인이었던 거죠. 실제 집주인을 만나보니 부동산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었어요. 집주인이 아닌 사람을 안씨가 데리고 와서 가짜로 계약서를 작성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어쩌면 그렇게까지 사기를 칠 수가 있데요.”

8개월째 월세가 밀려 있는 와중에 CF도 도중하차 돈 들어올 곳이라고는 이태란의 방송 출연료뿐

현재 이태란이 살고 있는 아파트(47평)는 보증금 1천5백만원에 월세 1백만원으로 계약돼 있다. 하지만 월세마저 벌써 8개월째 밀려 있어 집을 비워준다 해도 1천5백만원인 보증금마저 제대로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안씨는 그것뿐만 아니라 그전의 전세보증금(7천만원짜리) 계약서를 담보로 모 카드회사에서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2천5백만원을 빌려 유용한 혐의도 받고 있다. 전세계약서를 믿었던 카드회사도 안씨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다.

이 와중에 이태란을 전속모델로 기용해온 업체들이 일제히 CF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가구 브랜드인 ‘이노센트’측이 지난 7일부터 CF를 내린 데 이어 한국얀센의 비듬샴푸인 ‘니조랄’ CF도 9일부터 방영을 중지하면서 TV광고에서 이태란은 완전히 사라졌다.

두 업체는 이태란의 매니저 고소사건이 발발한 직후엔 ‘이태란에게 잘못이 없는 사안’이라고 판단해 광고를 당초 예정대로 계속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이노센트’ 가구는 광고가 나가는 것을 항의하는 대리점이 늘자 ‘일단 CF를 중단하고 보자’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한국얀센도 앞으로 3개월여의 계약기간이 남아 있음에도 신규광고에 이태란을 기용하지 않을 계획임을 통보했다. 이태란은 ‘이노센트’측과는 지난 7월 초 1억5천만원(1년 계약)에 ‘니조랄’측과는 8월 8천만원(6개월 계약)에 각각 모델 계약을 한 바 있다.

어머니 황씨는 가족회의를 통해 안씨를 고소하기로 결정하고는 충격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딸이 겪을 고통을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쌀 한 톨,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는 고통스런 시간이 계속됐다. 잘못한 것이라곤 사람을 믿었던 죄밖에 없었던 어머니와 식구들은 뒤늦게 후회를 해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황씨는 안씨가 출연료 등을 착취하고 애 하나까지 딸린 이혼남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 안씨와 결혼할 생각을 했던 딸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견뎌내고 있는 딸을 보면 대견하기까지 하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매니저 안씨가 “자신의 연예기획사를 찾은 신인 탤런트들을 대상으로 ‘방송국 인사들을 소개시켜준다’며 성관계를 맺고 이를 촬영한 일명 ‘보험비디오’를 보관하고 있다”고 진술한 것으로 일부 언론에 보도돼, 안씨가 이태란이 신인시절인 98년 8월부터 연인관계를 맺을 때 섹스비디오를 촬영했거나 그 이후에도 한두 번은 촬영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무성했다.

“섹스비디오는 무슨 놈의 섹스비디오예요. 태란이에게 찍은 적이 있으면 솔직히 말하라고 했는데도 아니라고 펄쩍 뛰더라고요. 경찰조사에서도 밝혀졌잖아요. 이번 사건은 언론이 태란이의 피해 사실보다 섹스비디오 유무 등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선정적인 보도가 나간 것 같아요. 사람 한번 잘못 믿은 죄로 그런 소문마저도 감수해야 하다니….”

어머니는 ‘섹스비디오’말고도 “이태란과 3년 가까이 동거했다”고 안씨가 주장했다는 말을 듣고 더 이상 할말을 잃었고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쓰러지자 이태란은 촬영이 없는 날이면 어머니 곁에서 간호하며 애써 웃음지으며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애를 썼다.

마음 추스르는 딸 보며 용기 얻은 어머니 황씨“저보다는 태란이가 힘들죠. 불쌍해서 못 보겠어요”

“매니저가 검찰 조사 과정에서도 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동거를 했다고 주장하더라고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제가 곁눈으로 노려봤다니까요. 어쩌면 그렇게까지 사실무근인 얘기를 들먹이며 태란이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지….

같이 산 게 아니라 태란이를 집에까지 데려다주면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집을 방문했고, 올해 들어서는 한 달에 한두 번밖에 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마치 우리집에서 부부처럼 생활한 양 얘기를 하는데 속이 다 뒤집어집디다. 매니저를 고소한 직후에 여의도에 있는 안씨의 오피스텔 사무실로 보낸 침대와 식탁 등 가구는 처음 일산으로 이사할 당시 그 사람으로부터 선물받은 것인데, 가족들이 모두 그에 대한 기억들을 지우고 싶어해 돌려보냈을 뿐이에요. 태란이와 살림 차리고 살았던 가구들이 아니란 말이죠.”

이태란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동료 연기자에게 심려를 끼친 데 대해 몹시 미안해하고 있다고 했다. 안씨가 이태란을 주변 사람들과 격리시키는 등 지나치게 구속하는 바람에 동료 연기자들조차 이태란이 휴대폰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좋아’에 함께 출연 중인 탤런트 유준상이 휴대폰 단말기를 협찬받아 이태란에게 건넸다가 엉뚱한 불똥이 튀기도 했다.

“오늘, 지금 일을 봐주고 있는 매니저가 올해 초 태란이 명의로 뽑았던 차 중에 하나인 에쿠스를 팔았어요. 그 돈으로 빚을 갚아도 아직 1억 몇 천만원이 남아 있어요. 사위(이태란의 형부)가 태란이 매니저를 하기 위해 고소를 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사람이 제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바깥세상으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태란이가 모든 걸 잃을 각오를 하고 나선 의미가 있지 않겠어요.”

이태란은 16일 직접 중고차 시장에 나가 에쿠스를 팔고 집에 돌아와 집안 대청소를 하면서 어머니를 위로했다고 한다. “태란이와 같은 제2, 제3의 피해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거듭 내비친 어머니는 “지금 당장 살 집이 없어 길거리에 나앉는다 해도 태란이가 아픔을 딛고 다시 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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