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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매 서고, 국수 건네고…가정사 꿰뚫은 소통이 강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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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증권은 올 초 파격 인사를 했다. 고액 자산가를 위한 자산관리 서비스 조직(SNI)을 본부급으로 격상시키며 실무 총책에 여성을 발탁한 것이다. 서울 강남 전체 SNI 지점을 총괄하는 강남사업부장에 이재경(46) 상무, 강북사업부장에 박경희(45) 상무를 임명했다. 서울 지역 자산관리 업무를 모두 여성에게 맡긴 셈이다. 두 상무 모두 현역 시절 1000억원대 고객 자산을 관리한 스타 프라이빗 뱅커(Private Banker·개인 자산관리사) 출신이다. 한 증권사 여성 PB는 “증권업계가 술렁일 정도로 화제였다. 여성 PB들이 업무 실적을 바탕으로 서울을 장악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삼성증권뿐 아니다. 은행·증권사 가릴 것 없이 금융권 PB에 여풍이 거세다. 지난해 말 기준 4대 은행(국민·우리·하나·신한은행)의 PB 462명 가운데 여성은 288명(62.3%)에 달한다. 정규직원(5만2515명) 전체를 놓고 보면 여성 비중은 42.4%(2만2250명)에 불과하다. 하나은행의 경우 PB 194명 중 143명(73.7%)이 여성이다. 대체로 보수적인 금융회사에서 PB만큼은 여성이 휩쓸고 있는 것이다.
 
씨티은행이 1세대 여성 PB 사관학교
여성 PB의 부상은 최근 1, 2년 사이의 변화가 아니다. 여성 PB들은 “한국 금융권에서 15년 이상 길러진 여성 인재들이 이 분야에서 두드러진 실적을 보이면서 승진한 현상일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1세대 여성 PB는 1997년 외환위기 전후로 탄생했다. 당시 금융권에서 처음으로 투자형 상품을 서울 부자들에게 팔며 PB를 양성한 씨티은행은 ‘여성 PB의 사관학교’라고 불린다. 삼성증권의 두 여성 상무를 비롯해 백혜진 역삼중앙지점장, 박완정 서초지점장, 우리투자증권의 노차영 상무, 원미경 부장 등 내로라하는 PB들이 씨티은행 출신이다. 이재경 상무는 “외국계 은행이라 유난히 여성이 많았다. 당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교육을 받은 게 차별화된 강점으로 작용해 은행과 증권사에 널리 퍼졌다”고 말했다.

2000년대 들어 펀드 같은 복잡한 투자 상품이 대거 출시된 것도 PB 수요를 증가시킨 요인이다. ▶소비자에게 상품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점점 다양해지는 투자처를 하나로 묶어 관리해주는 새로운 업무 영역이 생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섬세하고 의사소통에 능숙한 여성이 두각을 보였다는 게 금융권의 자체 해석이다. 흔히 PB의 역할을 ‘고객 관리’와 ‘자산 관리’로 나누는데, 고객 관리 측면에서 여성 PB가 뚜렷한 우위를 보였다. 이형일 하나은행 PB본부장은 “자산관리 지식은 반복된 교육과 전문가의 지원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고객 관리 역량은 단기간 훈련을 통해 길러지는 게 아니다”라며 “고객과의 소통에선 여성이 뛰어난 역량을 보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문지식보다 꼼꼼함이 중요”
현장에서도 PB의 최대 덕목으로 전문적 지식보다는 꼼꼼하고 섬세한 성격을 꼽는다. 갈수록 다양한 금융 상품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주식·채권·세금을 한 번에 상담하고 싶어 하는 고객의 요구를 PB가 모두 충족시켜주기는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각각의 전문 분야는 본사 소속 세무사나 애널리스트를 연결해 주고 PB는 전체적인 자산 배분 점검, 고객과 소통에 집중하는 식으로 분업을 하게 됐다. 현주미 신한PWM 압구정센터장은 “고객 자산관리를 해 주려면 자녀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결혼할 연령인데 사귀는 사람은 있는지, 보유 부동산은 월세가 꼬박꼬박 들어오는지 등 시시콜콜한 점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 “이런 사항을 메모해 뒀다 자녀 중매도 서 주고 부동산 중개를 도와 주면서 꼼꼼히 챙겨줄 때 고객의 신뢰를 얻는다”고 덧붙였다. 현 센터장은 “비 오는 날이면 국수를 사뒀다 ‘입맛 없으실 때 끓여 드시라’고 건네거나 강남에서 인기를 끄는 화장품이 있으면 샘플을 구해 ‘써 보시라’고 전해준 경우도 있다”며 “가정사를 다 털어놓는 관계가 되면 웬만해서 다른 이에게 자산관리를 맡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적이 숫자로 나오는 점도 여성 차별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여성 PB가 약진한 이유다. 이종숙 유진투자증권 압구정지점 부지점장은 “고객 자산을 얼마나 굴렸는지, 수익을 얼마나 안겨줬는지가 모두 숫자로 드러나고 이 실적을 바탕으로 승진하기 때문에 여성 차별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며 “여성 PB가 실적이 떨어질 때 더 악착같이 매달리는 근성이 강한 편”이라고 말했다. 고액의 금융 자산을 굴리는 이들이 대부분 중·노년층인 것도 여성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정연아 우리투자증권 골드넛센터 PB팀장은 “나이 드신 고객들은 금융상품 만기를 챙기거나 새로운 상품 가입을 위해 정보를 찾는 데 불편해 하는 경우가 많다”며 “시황이 급변하거나 만기가 다가올 때면 먼저 연락해 알려주는 세심한 관리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능력에 따라 몸값 천차만별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많은 반면 쏟아지는 고객과의 약속과 자기 계발 등으로 업무 강도는 높은 편이다. 이재경 상무는 “보통 고객을 만나고 급변하는 경제 환경에 대한 공부를 하느라 밤 11, 12시쯤 귀가하고 주말에도 나와 시황을 미리 분석하는 것은 기본”이라며 “업무 외 경제 지식이 부족하면 고객과 제대로 된 상담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한 중견 증권사의 여성 PB도 “세법이나 금융 규정이 계속 바뀌니 공부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혼한 여성 PB들 대부분 ‘가정은 포기했다’고 하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털어놨다.

업무 강도도 높고 이미 진출한 여성들과의 경쟁도 치열하지만 더 많은 여성이 도전해 볼 만한 분야라는 게 현역 PB들의 공통된 조언이다. 임민영 한국투자증권 압구정PB센터 차장은 “국내에선 아직 개인 재무관리가 걸음마 수준이라 앞으로 젊은 계층이나 중산층까지 금융 자산관리를 PB에게 맡기는 풍토가 확산될 것”이라며 “여성들의 강점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인 만큼 금융권의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성 PB는 “중소 금융회사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스타 PB는 스카우트 제안을 1년에도 여러 차례 받을 정도로 인기”라며 “프로야구 선수처럼 본인의 능력에 따라 몸값을 크게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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