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 장편 연애소설 가슴 휑한 우리들 자화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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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39.사진) 의 장편소설 『미란』에선 '강원도의 힘''오!수정'과 같은 홍상수 영화의 냄새가 난다.

처음에는 그냥 그렇다가 하루나 이틀쯤 지나면 서서히 마각을 드러내며 자꾸만 의식 속에 떠오르는 식이다. 서서히 가슴을 후벼파고 사람을 서늘하게 만든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미란』도 사람을 한없이 우울하게 하는 소설이다.

『미란』은 우선 연애 소설이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30대 후반의 변호사로 예기치 못한 세월의 흐름 속에 서서히 세속화돼가는 인물. 그의 삶에 끼어든 여자 두 명이 바로 성은 다르지만 이름은 같은 두 명의 미란이다. '나'는 한 명의 미란과 결혼을 하고 또 한 명의 미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소설의 각 장은 "내가 다시 미란을 만난 건…"이라며 미란을 겹쳐 놓는다.

군에서 제대한 '나'는 제주에 여행을 갔다가 호텔 바에서 일하고 있는 미란과 마주친다. 첫사랑 미란은 그렇게 찾아왔고 몇 번의 섹스를 나눈 뒤 그녀는 꿈인 듯 떠나가 버린다.

당시의 '나'는 "당신의 몸을 조금이라도 만져보고 싶어. 그게 섹스를 뜻하는 건 아니야.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거하고는 뭔가 조금 다른 감정이야. 말하자면 당신이 이 세상에 정말 존재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당신의 체온을 통해. 그 흐름의 일부라도 말이야"라며 진심이 전달되지 않을까 불안해 하던 사람이었다.

몇 년 뒤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고 그 몇 년 뒤 또 다른 미란을 만나 결혼한 '나'에게 첫사랑 미란은 끊임없이 출몰한다. '나'는 일상 속의 부인 미란에게 비밀로 하고 첫사랑 미란을 찾아 말레이시아로 떠난다.

멜러물의 외피를 취하고 있는 이 소설은 그러나 관계 맺기가 불가능해진 세상에 대한 덧없음을 토로하는 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인 동시에 엉뚱한 타인과 동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토록 많은 것을 잃어가는 와중에 때때로 삶이 알려주곤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겉으론 일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듯하지만 가슴 한 켠에 큰 구멍 하나가 뚫린 채 지내고 있다. 이는 연애가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절절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절절해지지 못하나. '나'의 사랑이 실패하는 이유는 그런 질문, "왜 절절해지지 못하나"란 질문을 던지는 일조차 상투적이 돼가기 때문이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일마저 상투성에 내놓고 있기에 첫사랑 미란이 죽은 뒤에도 '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생일상을 받을 때마다 의식적으로 한번씩 진저리를 치는 일밖에 없는 것이다.

윤대녕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시적인 문체나 이미지 사용이 배제되고 드라이한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 이전 소설과의 차이점이다. 읽히기에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문장과 문장이 시어처럼 떠오르는 맛을 기대하던 독자들은 약간 의외의 반응을 보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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