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방송 미국식이냐, 유럽식이냐?

중앙일보

입력

KBS.MBC.SBS.EBS 등의 지상파 디지털 방송방식을 놓고 정부와 학계.방송계 등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정보통신부가 1997년 미국식으로 방송방식을 정함에 따라 일부 방송사는 2005년 전국 방송을 앞두고 지난달 서울.수도권 일부에서 본방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방송계 등에선 현재 MBC와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비교시험 추진협의회'가 벌이고 있는 미국식과 유럽식의 비교시험 결과 수신상태가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방송방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협의회측은 다음달 중순 비교시험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그러나 지난 8월 우여곡절 끝에 비교시험을 허용한 정통부는 시험 결과에 관계없이 미국식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방송계 등에선 이동수신 등에서 수신상태가 미국식보다 좋은 유럽식을 배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LG전자 등 가전업계는 국내산업 발전을 위해 고화질인 미국식을 고수하고 있다.

때문에 방송계와 학계.시민단체들은 국민이 앞으로 5~10년 동안 디지털 수상기를 사기 위해 약 50조~60조원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신상태가 유럽식에 비해 좋지 않은 미국식의 문제점을 정부가 간과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박병완(朴秉完)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장은 "유럽식은 미국식보다 전파간섭(multi-path) 을 덜 받기 때문에 건물이 많은 도시 등에서 수신상태가 좋고 국내 산악지형에 적합한 방송방식"이라고 말했다.

이완기(李完基) MBC디지털기술팀 부장은 "미국식은 전력효율이 높아 전력이 같을 경우 전파가 좀더 멀리 가는 장점이 있으나 국내 여건에선 오히려 전파간섭 문제가 있어 전파가 멀리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또 "방송방식을 유럽식으로 바꾼다 해도 그에 따른 손실은 크지 않다"고 강조했다. 국내 디지털 수상기가 1만대도 채 보급되지 않은 데다 방송사의 고화질 디지털 전환은 전송방식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는 관악산 송신소의 미국식 변조기를 유럽식으로 바꾸는 데 드는 돈은 약 6억원에 그친다고 덧붙였다.

또 최근 비교시험 중 이동.고정수신 점검 내용이 일부 밝혀지면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이동수신 중 미국식은 화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 반면 유럽식은 잘 나왔다. 고정수신도 유럽식이 미국식 못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나 97년 미국방식 결정 때 정통부가 후원한 '디지털방송추진위원회'의장이었던 이충웅(李忠雄.전기공학부) 서울대 명예교수의 견해는 다르다. 李교수는 "유럽식이 이동수신에 좋은 것은 사실이나 미국식은 집안에서 수신할 경우 유리하며 이동수신 부분도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국내 지상파의 주파수 대역(6㎒) 과 유럽의 주파수 대역(8㎒) 이 달라 디지털 방송방식을 유럽식으로 바꿀 때 드는 추가비용이 만만찮다"고 주장했다.

차양신(車亮信) 정보통신부 방송위성과장은 "디지털 방송이 늦어지면 국내 산업이 몇년 뒤로 처지며 관련 부가산업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며 "이동.고정수신의 시험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논란의 핵심은 전송방식이다.지상파 디지털 방송 방식은 비디오.오디오.전송방식으로 구성돼 있으며 비디오.오디오 방식은 미국식과 유럽식 사이에 별 차이가 없어 전송방식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박구만(朴求萬.매체공학과) 서울산업대 교수는 "방송방식은 한번 결정하면 수십년 동안 사용되므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식보다 늦게 개발된 유럽식도 고화질이며 기술 발전으로 유럽 전송방식을 국내 주파수 대역에 맞게 처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방송기술인연합회측은 전파 이용환경, 좁은 국토, 높은 인구밀도, 수출지향형 산업구조 등 여러 측면에서 국내와 유사한 대만이 지난 6월 비교시험 후 당초 계획했던 미국식에서 유럽식으로 방송방식을 바꾼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주장했다. 특히 미국은 미국식.유럽식의 복수 방식을 놓고 논란을 벌이다 올해 초 미국식 단일로 결정했으나 수신상태의 불만족을 이유로 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최민희(崔敏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총장은 "시청자 입장에서 고화질과 부가 서비스도 중요하지만 디지털 방송은 이동수신이 얼마나 잘 되느냐가 핵심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