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예창작학회 출범… 52개대 설치 외형 급성장

중앙일보

입력

지난 10일 오후 서울 남산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세미나실. 이 학교 교수로 있는 소설가 김양호씨의 지도 아래 학생 15명이 자신이 쓴 습작 소설을 발표하고 있다.

"장소 묘사가 부적절하다."

"이런 구성은 너무 작위적이다. TV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아니냐."

자신의 소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에 얼굴이 빨개진 학생도 있었고 어쩌다 칭찬받은 학생들의 얼굴엔 미소가 감돌았다. 건물 밖 벤치에서는 시 세미나팀의 시작 수업이 한창이었다.

'문학의 위기'란 말 자체가 설명력 부족한 관습적 표현으로 굳어가고 있는 요즘, 교육 현장에서는 여전히 소설과 시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는 학생들이 만추의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이날 오후 3시 서울 남산 문학의 집에서는 전국의 문예창작과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교수.강사.소설가.시인 등 70여명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문예창작학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가입 회원은 소설가 김원우.박덕규, 시인 이승하.정끝별 등 1백40여 명.

국문학계나 국어교육학계 사이에서 이도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자리해 있던 문예창작학의 일종의 '독립 선언'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모인 데는 우선 문예창작과가 외형적으로 급성장해 규모면에서 다른 과에 필적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현재 중앙대.동국대.고려대.추계예대.경기대 등 4년제대 32개, 서울예대.숭의여대 등 2년제 전문대 20개 등 52개 대학에 문예창작과가 설치돼 있다.

1950년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중앙대 문창과 전신) 를 시작으로 10여년 전만해도 15개 남짓한 문예창작과가 설치돼 있을 때와 비교하면 그 숫자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재학생 수도 6천여명에 달하고 매년 1천명 가까운 졸업생이 배출되고 있다.

문예창작과가 이렇게 늘어난 데는 별다른 실험실습실 없이 강의실만 있으면 학과를 만들 수 있다는 용이성도 큰 이유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짜임새 있는 창작 실습이 부족해 수업의 부실화가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학교도 많다.

반면 과거 '골방에 틀어 박혀 순수한 예술을 창조해낸다'는 식의 낭만주의적 예술가관이 사라지고 문학 창작도 정규 교육을 기본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대세를 이루면서 문학에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도 문예창작과 활성화의 한 이유다.

실제로 신경숙.하성란.마르시아스심 등 쟁쟁한 소설가를 배출한 서울예대의 경우 서울대, 연.고대 등 4년제대 졸업생들이 입학하면서 재학생 평균연령이 25~26세에 이른다.

이 대학 김혜순 교수(시인) 는 "이제 범 대중적인 관심은 영화 등의 영상매체로 한정될 것이고 본격 문학에 대한 관심은 소수 매니어층에게 기대할 수 있는 일이 됐다"고 전망했다.

문예창작학회 초대회장을 맡은 단국대 김수복 교수(시인) 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많은 문창과 학생들이 문인 활동을 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이제 문학창작 교육을 수정하고 정체성 확립에 나서야 한다"고 설명했다.

문인 배출 중심의 교육에 더해 중고등학교 문예창작 교육 부문에 문예창작과 졸업생들이 나갈 수 있도록 교육부에 건의한다거나 학술진흥재단의 학술분류표에 제외된 문예창작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받도록 하겠다는 목표다.

그리고 현재 문예창작과 재학생들의 상당수가 본격 소설이나 시보다 드라마 극본, 영화 시나리오 등에 관심을 갖고 있는 현실에 발맞춰 교과과정을 개편해야 한다는 요구도 높다. 협성대 박덕규 교수(소설가) 는 "재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영상 매체 쪽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며 "방송 구성학 등 새로운 과목들을 늘리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예창작과가 가진 또 하나의 고민은 "창작 기술 습득만으론 걸출한 문인을 배출할 수 없다"는 비판을 어떻게 불식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종래의 한국적인 주제.소재.정서에 집착해 온 창작 교육이 세계화의 영향으로 한계에 부딛친 현실에서 세계시민다운 큰 시각과 깊은 앎을 학생들에게 주지 못한다면 새로운 문학을 제시할 작가들을 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는 단순한 글쓰기 기법보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전체적인 앎이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 아래 문예창작 교육을 대학원 과정에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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