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천일馬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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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새들의 건축술은 놀랍지 않나요

거센 폭풍우에도 나뭇가지 하나 잃지 않는 저 까치집을 보세요

하지만 그들은 떠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제 집을 버리죠

'즐기면 레저, 빠지면 도박'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는 경마장 관람대 증축 공사장 앞에서

경마 예상가 금마씨는 수십 장의 마권을 흩날리며 말했다.

마사회가 경마 우울증을 앓는 이들을 위해 상담실을 개설했다죠

전매청은 언제나 폐암을 걱정하지요

욕망의 성채(城砦), 라는 표현은 조금 진부하군요. 여기는 매슈 아놀드가 말한

묻힌 삶 the burier life을 꺼내주는 곳이에요 땅을 뒤엎을 듯한 말발굽 소리를 들어보아요

우리들의 국가는 늘상 마취제와 각성제를 교대로 투입해요

당신은 말이 달리는 2분 여 동안 무슨 생각을 하나요

매장되었던 영혼이 땅 위로 솟구치며 춤을 추는 느낌이에요

말들의 탐스런 엉덩이, 나는 저 뿌연 주로에서 압구정동의 스펙터클을 보지요

경마는 일종의 벤처 사업입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나요? 금마씨가 나에 대해 묻자 나는 얼버무렸다.

건달이죠. 경마와 <순풍산부인과> 보는 게 내 유일한 낙입니다

전화걸 대도 없어요. 베팅 정보 '배아무개의 과녁' (700-6901) 이외엔

당신은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네요. 젊음은 잔인한 겁니다.

언젠가 지나쳤던 프로방스 지방의 한 경마장, 난 그때에 김현 선생을 떠올렸을까

그가 떠난 이곳은 말들이 영영 사라져버린 모래 주로(走路)같다는 생각……나는 왜 별빛 따위에 삶을 베팅한 걸까

누구 말대로 고흐가 돈푼깨나 만졌다면 귀를 잘랐을까……그러나

진정한 말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귀 아니라 또 뭐는 못 자르겠어요

오호, 당신은 마주가 꿈이로군요. 킬킬, 나는 그냥 말의 감식가로 남겠어요. 국제적 똥말들이 과천벌에서 명마로 군림하는 현실이 코믹하지 않나요. 이젠 정치판에도 외국산 변마들을 수입하면 어떨까요

삼 년 전 '두배로' '라피트 샘'이란 말은 내 친구에게 1,050배라는 폭탄 배당을 선사한 바 있어요

물론 인생은 바꾸지 않았죠……그 친구 시가 생각나네요

시집 한 권에 삼천 원/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천 배당에 쑤셔넣으면 남들 두 달 월급인데/생각하면 마음은 어느새 주로가 되네

영혼이 무거워 제대로 달릴 수가 없어요. 어쩌다가 시는 이리 과도한 핸디캡이 되어버렸을까요

경마장에서도 정보는 중요하죠. 승부하지 않는 말에 돈을 걸 수는 없잖아요

금마씨는 여기저기 핸드폰을 건다. 6번 말이 간대? 10번은 없다구?

그는 말울음처럼 히히힝 웃으며 말한다 제 인생도 쏘스로 점철된 인생이었죠

K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쏘스가 있어 8학군으로 전학왔는데, 막상 떨어진 곳은 말죽거리 근방 똥통학교……팔자죠 뭐. 대학도 눈치작전 피다가 미달 쏘스가 있어 S대에 응시했구요

386…… 그러고 보니 정보화 세대로군요

이 경주엔 눈여겨볼 말이 뭐가 있나요? 예술도 요즘은 경마 중계식으로 보도하데요

나는 지금 몇 위로 달리고 있을까. 별은 몇 개를 받았을까요

이제 문학도 막판 경주 같지 않아요? 밑천은 떨어져가고 루머는 번성합니다. 뚜껑은 열리고 엉뚱한 말들이 배당판을 움직이고 있어요

자해(自害)냐 해탈이냐? 이게 요즈음 나의 화두죠

내 인생을 예상하진 마세요. 똥말은 식용으로, 우수마는 승마장에서 우아하게 퇴역의 말년을 보내죠

변마들의 이름은 한결같이 슬퍼요. '무한정 우승'이란 말은 왜 한번도 우승을 못하는 걸까요

이번 경주엔 네버엔딩 스토리(23전 4/8)가 간다는군요

그 말이 내 묻힌 삶을 꺼내줄까요?

네버엔딩 스토리예요

유하(1963~ ), '천일馬화 - 1800M 1군 핸디캡 연령 오픈 일반 경주 발주 10분전 경마 예상가 金馬氏를 만나다'

시집 4쪽 분량의 작품. 중략하였으나 시인의 번뜩이는 재치와 활화산 같은 언어는 끄떡없습니다. 욕망의 질주. 경마장에서 그가 날린 이 한 장의 전문이 몽롱한 세상에 배팅한 내 삶을 한 방에! 끝내줄까요.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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