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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피보다 진한 게 자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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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면은 신문의 얼굴이다. 그 날의 얼굴 단장은 늘 신문의 가장 큰 고민이다. 기사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사진이다. 그 신문의 시각과 고뇌를 반영한 1면 사진은 신문의 인상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 서울·평양發 두 장의 사진

지난 13일자 중앙일보는 1면용으로 두 장의 사진을 골랐다. 서울 시청 광장에 모인 5만여명의 시민들이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규탄하고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는 시위 사진과 같은 날 평양에서 열린 대규모 군중집회 사진이다.

'붉은 악마'들의 함성이 메아리쳤던 그 자리에 다시 모인 시민들은 녹색 풍선을 하늘로 날리며 또 한 번의 축제를 즐기는 듯했다. 반면 북한 당국의 NPT 탈퇴 결정을 지지하고, 대미 결사항전을 다짐한 평양 집회 사진에서 받은 느낌은 한마디로 '일사불란(一絲不亂)'이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촉구하는 촛불 시위가 열렸던 서울의 현장은 어느 날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는 시위 장소로 변했다. 평양에서는 1백만명의 군중이 한 목소리로 강성대국과 조국보위를 쩌렁쩌렁 외쳤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두 장의 사진은 너무나 당연한 진실을 우리가 가끔씩 잊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깨우침을 준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한가지 의견만 존재하는 획일적 사회가 아니라 여러 견해가 공존하는 다양한 사회다. 대를 이어 충성해야 하는 세습 사회가 아니라 제 손으로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주권재민의 사회다.

자기 목소리를 죽여야 사는 닫힌 사회가 아니라 언로가 보장된 열린 사회다. 북핵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자유 민주주의는 민족주의에 우선한다'는 절대 명제가 가끔씩 흔들리는 것 같은 모습을 보게 된다.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운 북한은 핵을 무기로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과 위험한 게임을 벌이고 있다. 북한 특유의 '벼랑끝 외교'라고 폄하하면서도 내심 북한의 기개와 지략에 감탄하는 기류가 우리 사회에 없지 않은 것 같다.

통일이 되면 다른 건 몰라도 외교만큼은 북한 출신에게 맡겨야 한다는 농담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남북한이 하나가 되면 북한 핵은 결국 우리 것이 되는 게 아니냐는 순진한 얘기마저 들린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북한을 비록 못살지만 자존심 강한 형제로 보는 감성적 유대가 한국의 전후 세대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핵무기로 무장한 북한이 남한과 하나되는 것을 주변국이 용납할 리 없다. 진정 우리가 통일을 원한다면 북한 핵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다양성을 억압하고 획일성을 추구하는 전체주의 국가에는 미래가 없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의 일본, 공산독재의 소련은 하나같이 망했다.

민족보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소중한 가치지만 이를 지키겠다고 동족간에 피를 흘리는 비극은 막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절체절명의 민족적 과제다. 그러나 뚜렷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 못살지만 자존심 강한 북한

북한 핵 문제의 본질은 한반도의 시대착오적 냉전구조에 있다. 냉전구조의 해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분단의 당사자인 남북한과 미국.중국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통해 북한의 체제 불안을 해소하는 방안을 서둘러 찾아야 한다.

죽은 4자회담을 되살려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북한 핵의 동북아 도미노 효과를 고려할 때 4개국에 러시아와 일본이 참여하는 동아시아판 안보협력기구를 창설, 한반도 비핵화와 새 안보질서 구축을 논의하는 방안도 진지하게 검토해 볼 문제다.

배명복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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