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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행복은 값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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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서령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

사무실엔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엔 당연히 컴퓨터가 놓였다. 책상에 앉는다는 것은 컴퓨터 앞에 앉는다는 의미다. 컴퓨터를 밀쳐놓고 새삼 종이책을 펼치거나 펜글씨를 쓸 수는 없다. 종일 모니터 안에서 내가 읽어 치우는 활자가 도대체 얼마만한가. 그러나 정작 머리에 입력되는 정보는 많지 않다. 마음을 울리는 내용은 더욱이 드물다.

 연초에 서로들 푸짐하게 복을 빌었다.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은 미쁘고 고맙지만 남발되면 의미가 증발해 버린다. 복이 과연 뭔가? 돈인가? 건강인가? 잘난 자식인가? 편한 친구인가? 기분 좋은 마음인가?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뭉친 것이라면 좋기야 하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런 항목의 속성이 한결같을 수야 없다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지금 가졌다 하더라도 지키기 위해서는 줄곧 긴장해야 한다. 긴장과 노력과 정성을 바쳐 돈과 건강과 기분 좋음을 유지하는 것이 행복인가. 과연 그렇게 불러도 괜찮은 것인가?

 내가 하도 복이 뭔지를 캐묻고 다니니까 누군가 한자를 풀어보면 답이 의외로 명료해진다고 일러줬다. 간단하게 말하면 넓게(<7550>) 보는(示)는 것이 복(福)이란다. 반대 개념을 알면 뜻이 더 뚜렷해지니 화(禍)는 허물(過)을 보는(示) 것이란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상에 생명을 받은 이래 수만 년간 바로 이 ‘넓게 보기’ 위한 방향으로 필사적으로 진화해온 것 같다. 덕분에 우리는 포털의 검색 창에 단어 하나만 치면 사람이든 사물이든 뼛속까지 깡그리 검색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시공을 자유자재로 뛰어넘는 것도 가능해져 싸이의 말춤을 수억 명이 동시에 따라 한다. 그러나 넓게 본다는 건 온 세계의 소식과 지식과 기술을 시시콜콜하게 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세상과 이웃의 허물을 들여다보는 대신 멀찍이 밀어놓을 줄 아는 ‘광폭시각’을 복으로 규정했다는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서양인들의 복은 우리와는 좀 다르다. 영어의 happiness는 happen에서 온 말로 ‘예상치 않는 시점에서 쏟아지는 신의 은총’이고 불어의 bonheur는 bon(좋은)+heur(시간)이다. 둘 다 시간과 신이 연관된 단어다. 현대 한국인이 자주 쓰는 ‘행복’은 다른 여러 추상어가 그렇듯이 일본을 거쳐 수입된 말이다. 메이지 시대 일본이 서양의 happiness나 bonheur를 번역하면서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일본어 ‘사치’에 해당하는 幸과 중국과 한국이 오랫동안 사용했던 복(福)을 묶어 ‘행복’이란 말을 급조해냈다. 일본어 사치는 경계를 나타내는 ‘사(さ)’와 영력을 의미하는 ‘치(ち)’가 합성된 말이다. 원래는 수렵에서의 풍부한 사냥감이 ‘사치’였다. 지금도 일본인은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을 우미노사치(海の幸), 산에서 잡은 짐승·산나물·열매들을 야마노사치(山の幸)라고 부르고 있다. 자연의 정령들이 경계를 허물고 인간에게 뭔가를 쏟아부어 주는 것을 ‘행’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동양은 시간보다는 공간 개념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나가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에서 읽었다). 중국과 우리가 자주 쓰던 복도 일본과 흡사하다. 세상 바깥과 인간세를 잇는 귀신들이 인간이 원하는 생명이나 곡식을 갖다 줬다고 여겼다. 부뚜막을 지키는 조왕신, 집안을 지키는 성주신, 아기를 낳고 길러주는 삼신, 집터를 지키는 터주신이 수만 년 동안 한국인의 복을 관장해 왔다.

 매일 컴퓨터 앞에 앉는 나의 행복도 본질은 거기서 멀지 않다. 어제 통인시장 어물전에서 내 손바닥 둘만 한 가자미를 샀다. 한 마리에 8000원이다. 내 뒤를 걷던 아주머니는 ‘뭔 가자미가 이렇게 비싸?’ 타박을 놓지만 나는 8000원이 비싸다고 여길 수가 없다. 내 살림이 아주머니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한창 바다에서 헤엄치던 이 굵직한 놈이 내 손에 닿기까지의 기나긴 여행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에 드는 기름값이며 차에 싣고 올라오는 차비며 수족관의 전기 값이며 어부와 운전기사의 일당이며 생선 가게 아줌마의 이문이며! 가자미 한 마리를 내 입에 넣기까지 이렇게 여러 사람의 노고와 기술이 총동원되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지만 문제는 거기 있지 않다. 아무리 여러 사람이 아무리 전력을 다해도 이렇게 큼직한 가자미를 만들어낼 재간은 없다. 누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손길이 가자미를 바다에 둥둥 띄워놓지 않았다면! 나의 일상 안에 공으로 던져지는 ‘행(幸)’이 어디 가자미 한 마리뿐이랴. 일단 내 입에 들어가는 곡식과 열매와 생선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폭넓게(<7550>) 들여다보기(示)! 새해 내가 받을 복(福)은 여기서부터다!

김서령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