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디까지일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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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호 24면

사진 티캐스트

“만약 당신이 누군가와 평생토록 맺어진다면 그건 둘의 일생을 함께 거는 것이며, 그 결합을 갈라놓거나 훼방하는 일을 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거예요. 부부가 된다는 건 공동의 기획인 만큼 두 사람은 그 기획을 끝없이 확인하고 적용하고, 또 변하는 상황에 맞추어 방향을 재조정해야 할 거예요.”

4만 관객 돌파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무르’

얼마 전 한 트위터 친구가 영화 ‘아무르’를 보면서 떠올렸다며 『D에게 보낸 편지』라는 책을 소개했다. 58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2007년 부인 도린과 동반자살한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고르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모음이다. 도린은 거미막염이라는 불치병으로 평생을 투병했다. 84세 남편은 83세 아내와 한날 한시에 죽는 길을 택했다. “당신은 내게 삶의 풍부함을 알게 해주었고 나는 당신을 통해 삶을 사랑했다”는 앙드레 고르의 일생을 관통한 단어는 아무르(amour), 사랑이었다. 과연 상대를 사랑하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디까지일까.

이것은 타임지와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최고의 영화로 고른 ‘아무르’의 질문이기도 하다. 평생토록 사랑하고 의지했던 사람이 어느 날 반신불수가 됐다면? 고르 부부처럼 ‘공동의 기획’을 끝없이 확인하고 적용하던 두 사람이 급변한 상황 앞에서 방향을 재조정해야 할 순간이 닥쳐왔다면? 누군가에겐 호르몬의 장난일 뿐인 사랑. 하지만 오랜 시간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가꿔온 어떤 이들에겐 냉혹한 현실을 버텨나가는 등대가 돼주기도 한다.

딸 에바(이자벨 위페르)를 결혼시켜 내보낸 남편 조르주(장 루이 트랭티냥)와 왕년의 피아니스트 아내 안느(에마뉘엘 리바). 이들의 일상은 조용하고 편안하다. 어느 날 안느가 갑작스러운 마비 증세로 반신불수가 되면서 평온한 삶은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점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는 아내를 보며 조르주는 최후의 결정을 내린다.

몸짓 하나로 쌓아온 세월을 말하는 두 사람
첫 장면부터 대뜸 안느의 죽음을 밝히고 시작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일상에서 드러나는 부부의 밀도 높은 관계다. 친근하되 함부로 하지 않는 말 한마디, 몸짓 하나로 두 사람이 쌓아온 세월을 말해준다. 안느는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느냐고 묻는 남편에게 이렇게 답한다. “가끔 고약할 때도 있지만 너무 착해.” 인생의 황혼에서 아내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남자의 삶은 성공적인 게 아닐까. 조그만 일에도 늘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 아내에게 남편도 보답을 잊지 않는다. “당신이 오늘 유난히 더 예쁘다는 얘길 내가 했던가?”

그렇기에 아내의 단아했던 모습을 지켜주려 필사적인 조르주의 모습은 드라마틱한 연출을 자제했음에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그가 안느를 위한 모종의 결정을 내리는 순간 터져 나오는 인간적 고뇌와 비애 역시 폭발적이다. 다시, 『D에게 보낸 편지』를 떠올린다. 이 책의 부제는 ‘어느 사랑의 역사’다. 세상이 그 가치와 유통기한을 의심해 마지 않는 사랑, 그걸 무기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헤쳐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사랑의 역사. 이 영화를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죽음이라는 절대 명제 앞에 개인이 쌓은 사랑의 역사가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곱씹어보게 하기 때문 아닐까. 이것은 ‘아무르’를 죽음의 존엄성, 즉 ‘웰 다잉’의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라고만 보기엔 어딘가 미진한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언론의 관심은 노년의 배우들에게 집중됐다. 생물학적 나이가 갖는 뉴스 가치도 높았지만 그 나이가 아니고선 끌어안기 쉽지 않은 인생의 곡절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올드 팬들의 기억에 ‘남과 여’로 남아 있는 장 루이 트랭티냥은 올해 83세, 에마뉘엘 리바는 86세다. ‘히로시마 내 사랑’(1959) 이후 거의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신비의 배우 리바는 극단적인 선택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하네케 감독은 그동안 ‘하얀 리본’ ‘피아니스트’ ‘퍼니 게임’ 등에서 폭력의 본질과 인간의 잔혹성 등을 조명했지만, 이 영화에선 한결 순해진(!) 시선으로 임했다. 국내에선 개봉 한 달도 안 돼 4만 명이 관람해 예술영화로선 폭발적인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올 초 전미비평가협회 3관왕(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을 차지해 다음 달 열리는 제85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자로 유력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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