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 스타로지] 따뜻한 남자 박상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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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소리 듣는 TV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편안한 사람 만나는 재미까지 지울 순 없다. 옆집에 선량한 이웃이 사는 것도 소박한 행복이다. 박상원의 이미지가 바로 그렇다.

'여명의 눈동자'에서 그는 최대치(최재성) 처럼 뱀을 씹어대지도 않았고 '모래시계'에서 "나 지금 떨고 있니"라고 묻던 태수(최민수) 처럼 비장감을 조성하지도 않았다. 그가 맡은 장하림이나 강우석이 세상의 소용돌이로부터 비켜 서 있진 않았지만 그에 자극이나 현란함으로 맞서지 않았다.

살다 보면 어느 부근에서 알게 될 것이다. 세상엔 평균적인 사람이 많을 듯한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과잉이거나 미달이 뜻밖에 많다. 오버하거나 모자란 사람들의 총합이 평균을 만드는 것이다. 그에게는 평균이나 평범보다 오히려 평정(平靜) 이 어울린다.

내가 TV 연출자 생활을 시작할 무렵 그 역시 방송에 입문했다. 그래선지 항상 '동기' 같은 느낌이 든다. 내성적 청년이었던 그는 교양국 PD가 만드는 어설픈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역을 할 때나 지금 미니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만났을 때나 여전히 수줍고 조심스럽다. 처음과 끝이 다르고 카메라 안과 밖이 다른 사람이 많은데 그는 시종일관, 그리고 화면 안팎에서 두루 따뜻한 사람이다.

오랫동안 드라마의 중심인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에는 연기력과 행운, 거기에 플러스 알파가 있게 마련이다.

"늘 위기의식을 느끼며 사는 거죠. 박수소리에 멍들면 그걸로 끝이라고 믿었거든요. 카메라.조명.의상.분장에 의해 찍혀지고, 밝혀지고, 입혀지고, 칠해지지만 그것들에만 의존하는 건 위험합니다. 제 스스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늘 긴장하며 살지 않을 수 없죠."

방심이 연기자에게 가장 큰 적이라고 했다. 그의 편안함이, 그 자연스러움이 이런 긴장의 산물이었다고 생각하니 그가 더 커보인다. 그에게도 위기가 닥쳤던 적이 있었을까.

"위기는 테러처럼 예고가 없죠. 전 위기라고 감지될 때마다 그걸 여러 가닥으로 쪼개면서, 나누면서 살려고 노력합니다."

느릿느릿, 그러나 또박또박 말하는 그는 프로다. 프로의 냄새가 나지 않는 프로. 진정한 프로에게는 아마추어의 정열이 화석처럼 남아 있다. 그는 서정과 서사가 공존하는 캐릭터다. 개인의 순결한 욕망이 사회나 역사의 간계와 충돌할 때 그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얼굴을 그는 잘 표현해 왔다.

지금 그의 배역은 '가을에 만난 남자'다. 그가 지나온 여름은 예사롭지 않았다. 가을의 냄새가 빚어진 까닭이 있을 터이다. 좋은 선물은 포장을 하나하나 벗길수록 탄성이 나오게 마련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그는 현대무용가이기도 하다. 1970년대 말 그는 김경옥 현대무용발표회에서 무용수로 처음 무대에 등장했다. 춤추는 강우석 검사를 연상해 보라.

"그때 땀의 소중함을 터득했죠. 젖은 티셔츠에서 땀을 짜내는 기쁨. 해보지 않으면 모를 겁니다."

지금 박상원에게서 맡는 은은한 가을 냄새는 땀 흘린 후의 서늘함이 준 귀한 선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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