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방 쪽지 예산’으로 논란이 됐던 국회 예산결산특위가 증액한 4조원의 예산을 심사하면서 관련 회의록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예산의 증액과 감액을 최종 결정하는 계수조정 소위는 반드시 회의 내용을 기록하도록 돼 있지만 이 규정을 지키지 않고 여야 간사에게 증액심사를 위임한 것이다. 예산안 심사의 밀실·야합·졸속 논란에 이어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 논란으로까지 증폭되고 있다.
또 장윤석 예결특위 위원장과 새누리당 김학용, 민주당 최재성 의원 등 여야 의원 9명이 예산이 처리된 직후인 지난 1, 2일 중미와 아프리카로 외유를 떠난 데 대해 멕시코에 체류 중인 새누리당 김재경 의원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예산 문제 때문에 다소 (출국을) 서두른 감이 있다”고 말했다. 이달 15일까지 예산을 쓰지 않을 경우 국고로 귀속되는 불용액이 될 것을 의식해 출국을 서두른 것임을 시인한 것이다.
3일 국회에 따르면 국회 사무처와 예결특위는 올해 1월 예결위원들을 3개 팀으로 나눠 외국 시찰을 준비해 왔다. 이 중 장윤석 위원장이 이끄는 1팀(중미)과 김학용·최재성 의원이 포함된 2팀(아프리카)은 예정대로 출장길에 올랐다. 3~4명으로 구성된 3팀(아시아·태평양)은 오는 20일부터 아태지역 4개국을 시찰할 계획이었으나 1, 2팀의 외유에 대한 비난이 들끓자 일단 시찰 계획을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출국한 여야 의원 9명은 출장 사실을 당 지도부에도 보고하지 않은 채 출국해 여야 지도부는 중앙일보의 보도<1월 3일자 1, 3면>가 나온 이후에야 의원들의 외유 사실을 파악했다.
예결위 외유 의원 9명 중 새누리당 장윤석 위원장과 김학용·김재경·권성동, 민주당 최재성·안규백·민홍철 의원 등 7명은 예결위 심의 과정에서 이른바 ‘쪽지 예산’을 통해 모두 517억원의 국민 혈세를 자신의 지역구 사업에 끌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외유성 출장을 떠난 데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만 새누리당과 민주당 지도부는 이들을 감싸기에 급급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이날 아침 최고위원회와 고위정책회의를 각각 열었지만 외유성 출장에 대해선 아무런 사과나 유감 표명이 없었다. 오후가 돼서야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는 “ 사려 깊지 못했다”고 했고, 박기춘 민주당 원내대표는 소속 의원들에게 불필요한 외유성 해외 출장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멕시코에 체류 중인 장윤석 예결위원장은 이날 본지에 전화를 걸어와 “죄송하다”고 유감을 표명했지만 조기 귀국 여부에 대해선 “함께 온 의원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외유 의원들을 질타하는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지난해 대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강지원 변호사는 “이번에 새 당선인도 나왔고, 새 집권세력이 나온 만큼 이런 것 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며 “이번엔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 집단적으로 사과하고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게 해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새누리당은 이날 정치쇄신과 국회쇄신책을 논의하기 위한 정치쇄신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민주당에 제안했다가 ‘외유성 출장에 대한 비난 여론을 슬쩍 넘기려는 꼼수’라는 비판을 받았다.
권호·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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