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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공식 출장이라면서 … 예산도 일정도 공개 안 하는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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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예산을 처리한 직후 동료 의원들과 함께 해외시찰을 떠난 새누리당 김학용 의원과 민주통합당 안규백 의원 사무실이 나란히 붙어 있다. [김경빈 기자]
김경진
정치부문 기자

‘호텔방 야합 예산’의 주역인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 9명(새누리당 장윤석·김학용·김재경·권성동·김성태 의원, 민주통합당 최재성·홍영표·안규백·민홍철 의원)이 집단 외유에 나선 뒤 기자는 3일 후속 취재를 위해 예결위를 들렀다. 외유 의원들의 세부 일정과 목적, 예산 배정 내역 등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자의 질문에 예결위 직원은 “세부 일정에 대해 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국민 세금으로 떠난 ‘공식 출장’이라면서도 일정이나 예산 내역은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의원들의 방문국 대사관에도 전화를 걸어봤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윤 대사는 “서울에서 확인하면 될 것 같은데 국제전화까지 할 이유가 있느냐”며 “국회 쪽이나 외교통상본부 쪽으로 확인하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케냐의 김찬우 대사 역시 “국회에서 확인이 가능하지 않느냐. 대답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몸을 사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여야 의원들은 경쟁하듯 서로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새누리당은 의원 연금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고, 민주당은 30% 올린 의원 세비를 도로 깎겠다고 결의했다. 그런데 대선이 끝나자마자 이들은 의원 연금 몫으로 128억원의 예산을 통과시켰다. 65세 이상이 되면 죽을 때까지 월 120만원씩 받는 돈이다. 일반 국민이 이만큼의 연금을 받으려면 월 30만원씩 30년을 부어야 한다.

이뿐이 아니다. 예결위 계수소위 위원들은 국회 회의장이 아닌 호텔방을 잡아놓고 4조원 가까운 예산을 주물렀다. 이 예산에는 계수소위 위원들의 지역구 민원 예산도 듬뿍 담겼다. 외유 9명 중 새누리당 장윤석(경북 영주)·김학용(경기 안성)·김재경(경남 진주을)·권성동(강원 강릉) 의원과 민주당 최재성(경기 남양주갑)·안규백(동대문갑)·민홍철(경남 김해갑) 의원은 자기 지역구 사업 예산을 정부안보다 확 올렸다. 예산안에 따르면 이들 7명의 의원이 올린 금액만도 517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상황이 이런데 새누리당은 이날 민주당에 정치쇄신특위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국회의원의 특권을 포기하는 방안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국회 주위에선 “예산 졸속 통과와 의원 외유 등 악재가 잇따라 터지자 이를 덮기 위해 선수를 친 새누리당의 꼼수”란 비판이 나왔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하루 종일 이들에 대한 갖가지 비난 글이 쇄도한 게 무리는 아니다.

 한 네티즌은 “최악의 폭설과 경제한파로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서민들의 하루살이 삶입니다. 이 와중에 (의원들은) 따뜻한 나라로 호화여행이라니!”라며 울분을 토했다. “1억5000만원의 세금으로 아프리카 여행 간다고? 단돈 15만원이 없어 이 한파에 전기 끊기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저런 인간들이 국회의원? 정말 멋진 대한민국이다” “돈이 없어 분유값도 줄이는 판에… 이름 적어뒀다가 다음에 투표할 때 꼭 빼겠다”는 글들도 각종 인터넷 게시판을 메웠다.

  박찬종 변호사는 트위터에 “한마디로 ‘개그콘서트’감이다. 국민의 분노가 어떤지 아는가?”라며 강창희 국회의장에게 “즉각 귀국시키고 1억5000억원 외유 비용 반납하게 하고, 전원 윤리위에 회부하라!”고 촉구했다. 진보정의당 노회찬 공동대표 역시 라디오에 출연해 “적절치 않다.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만 조용했다. 대선을 앞두고 상대 당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줄논평’을 쏟아냈을 법한 일일 테지만, 이날만큼은 당 대표도, 대변인들도 입을 꾹 닫았다. 겉으론 싸우는 듯해도 자기 몫을 지키는 데는 한목소리였던 양당이다. 오후가 돼 여론이 악화하자 반응을 보인 것도 똑같았다.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는 “시기적으로 국민정서를 감안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며 사려 깊지 못했다”고 했고, 박기춘 민주당 원내대표는 소속 의원들에게 “지금은 뼈아픈 반성의 시간입니다. 불필요한 외유성 해외출장은 최대한 삼가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돌렸다. 끝까지 동업자다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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