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쏠림 대신 분산 … 한국 투자자들 변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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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마이클 리드
피델리티자산운용 대표

올해 자산운용업계는 세계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동시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투자자의 자산이 분산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시기별로 특정 주식형 펀드로 돈이 몰렸다. 하지만 요즘 들어선 일반 투자자도 오르내림이 심한 주식시장에 데였던 경험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낮지만 위험도 적은 해외 채권형 상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쏠림’ 현상은 심각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직전까지 사람들은 중국이나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등) 주식형 펀드만 찾았다. 금융위기 이후엔 반대로, 이런 펀드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국내 주식형 상품, 특히 특정 종목에 집중 투자하는 자문형랩 등으로 자금이 쏠렸다. 그러다 지난해 유럽 재정위기가 닥치면서 자문형랩 수익률이 급락했다. 투자자는 패닉에 빠졌고, 마땅한 새 투자처를 찾지 못하면서 결국 은행 정기예금 위주의 보수적인 투자로 돌아갔다. 원금 보장 성향이 있는 주가연계증권(ELS) 등 구조화 상품에 눈을 돌리게 됐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쏠림식’ 투자 성향은 한국의 대표적인 국민성 중 하나인 ‘빨리빨리’ 문화가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인의 이러한 특질은 정보기술(IT)·자동차 등의 산업이 급성장하는 데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투자의 세계에서는 이런 성향 때문에 리스크는 고려하지 않고 단기 차익만 노리는 투자가 만연하게 됐다.

 그런데 올 들어 이런 트렌드가 바뀌기 시작한 것 같다. 한국 투자자도 단기 차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은퇴자금의 필요성을 깨닫게 됐다. 은퇴자금 마련을 위해 자산을 다양하게 분배하고, 인생 계획에 따라 투자 기간을 따지는 등의 방법으로 포트폴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많은 이가 자산운용사의 대표로 있는 필자에게 개인적인 자산 관리 방법을 묻곤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투자 철학은 장기적인 인생 계획에 따른 자산 배분이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 개인적인 포트폴리오는 주식 자산 20%, 채권 자산 15%, 사모 펀드 5%, 부동산 관련 자산 50%, 그리고 와인 컬렉션과 현금 자산 각각 5%씩으로 구성돼 있다. 주식 자산은 단일 국가 펀드와 글로벌 자산배분 펀드 등에, 채권 자산은 글로벌·신흥국채권·하이일드채권 등에 골고루 투자하고 있다. 사모펀드와 부동산 관련 자산은 장기적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아시아에 주로 투자하고 있다. 와인 컬렉션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오르는 실물 자산이라는 점 이외에도 개인적인 취미 생활의 관점에서 투자하고 있다.

 포트폴리오 내 투자 비중은 대체로 1년마다 조정하고 있지만, 이때에도 가장 고려하는 점은 장기적인 자금 인출 계획이다. 단기적인 시장 변동성에 연연하기보다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적립식으로 꾸준히 투자한다. 투자 자산군별로 예상되는 중·장기적인 수익률·변동성과 개별 펀드 매니저의 운용 역량 등을 고려한다.

 필자가 이렇게 장기적인 시각에서 포트폴리오를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벌써 20년 넘게 오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독립 재무 설계사(Independent Financial Adviser·IFA) 덕분이다. IFA는 고객의 자산 규모, 소득 수준, 리스크에 대한 감내 수준 등 개인의 재무 현황 전반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최적화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준다. 투자 결정을 내리는 데 담당 IFA의 조언에 상당히 의존한다.

 아직 한국에서는 IFA라는 존재가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한국 투자자에게는 증권사 등에 소속된 프라이빗뱅커(PB)나 자산관리사(Financial Planner)가 더 친숙할 것이다. 하지만 특정 회사에 소속돼 있는 PB와 달리 IFA는 특정 회사의 개별 상품 판매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질 높은 재무 설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재무 설계의 포인트는 시기별 유행하는 상품을 좇아 투자하기보다는 개인의 인생 주기에 맞춘 자금 인출 계획에 따라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투자자의 투자 철학과 안목이 성숙해질 때 한국의 투자 문화가 한 단계 더 성숙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이클 리드 피델리티자산운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