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 스타로지] '은발의 청춘' 배철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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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얘기지만 TV에 비친 그의 첫 인상은 부랑아에 가까웠다.

1978년 대학가요제 무대에서 동료들과 함께 '탈춤을 추자'고 제의해 왔을 때 드럼 앞의 그는 탈을 쓰지 않고도 너끈히 탈춤을 출 수 있는 형상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경성 거리를 배회하다가는 '불령선인'으로 체포되기 딱 알맞은 얼굴을 그는 지녔다.

그 외모로 세기말을 거쳐 21세기까지 참 오래 버틴다고 농을 던지니 특유의 웃음으로 화답한다. 방송가에서 그의 포용력은 무적함대다. 다만 이야기의 빗장을 풀면 금세 단단한 내면의 질서를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깎여 허물어지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곧게(곱게□) 다듬어지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후자다. '다큐멘터리 배철수'의 완성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를 만난 날 창밖에 비가 내렸는데 성에 낀 차안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맞는 것 같아요."

느닷없지만 그의 거두절미는 언제나 이런 식의 휴머니즘이다. 히피와 공자가 한 울타리에 사는 느낌. 오랜 시간 그가 찾아 헤맨 것은 자유가 아니라 인간인 듯하다. 음악을 계속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제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죠. 연주에 있어서만큼은 완벽주의거든요." 청년기의 우상 딥 퍼플을 한국의 무대에서 만났을 때 그는 두 가지 이유로 눈물을 흘렸다. 하나는 음악이 좋아서. 그리고 또 하나는 세월이 미워서.

서태지가 '교실 이데아'를 외치기 훨씬 전에 이미 그는 교육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기억하는가. '공부하기 싫은 사람 학교 가기 싫은 사람 모여라'를 외치던 젊은 날의 배철수를.

세상엔 두 종류의 '딴따라'가 있다. 그저 남들과 달라 보이고 싶은 욕망을 지닌 자와 세상을 남들과 다르게 보고 싶은 자. 이번에도 물론 그는 후자다.

그에게 유니크한 건 중생대의 외모가 아니라 움츠러들지 않는 청춘의 패기다. 그의 비디오를 모사한 노철수도, 오디오를 흉내낸 배칠수도 그의 겉을 따라했을 뿐 그의 결(숨결) 을 카피하진 못했다.

그에게 유년의 구릉은 가난과의 정면대결이었다.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할까 턱을 괴며 생각했지만 그 숙제는 풀리지 않았다. 남들이 하복으로 갈아입은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그는 동복을 벗을 수 있었다. 그가 걸어온 인생의 활주로는 뜻밖에도 험준했다.

"창공의 푸른 꿈 때문에 항공대에 간 게 아니었죠. 이유는 단 하나. 수업료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그는 웃고 있다. 대중과 오늘도 음악으로 교신하기 때문이다. 스무 살 이후 그는 음악을 구기거나 접은 일이 없다.

얼굴 가득한 주름은 실상 그가 걸어온 음악의 여정이다. 새로운 음악을 들으며 젊음을 수혈받는 일상. 도리없이 그의 세포는 젊다.

세상에 태어나 잘한 일로 그는 세 가지를 꼽는다. 음악을 시작한 일, 음악의 전령사(디제이) 를 맡은 일, 그리고 결혼이다. 짐작이 간다. 11 년7개월을 계속하고 있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그 첫번째 연출자가 바로 그의 아내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chjoo@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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