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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스타」탄생의 순위…제2번 안종화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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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의 비곡」은 「고해와 같은 인생」의 이야기였다. 1923년 안종화 청년은 이 「대활동사진」에서 열연을 했다. 그 때 우리 영화사의 나이는 겨우 세돌을 맞고 있었다. 「스타」탄생의 순위로 치자면 안 청년은 우리나라 남우의 제2번.
반생이 지난 언젠가 그는 「한국영화발달사」를 저술하며, 그 첫마디를 이렇게 썼었다. 『한국 영화가 걸어온 길은 실로 형극고투의 돌길이다』-. 그 험준한 길을 걸으며 그는 평생 16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50대에 접어 들면서는 「휴머니즘」에 연연해 있었다. 「춘향전」하며, 「견우직녀」며, 모두 그런 흐름에서 「렌즈」를 열었다. 오늘 그의 현주소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철저한 망각 속에서 그는 혼자 매몰되어 산다.
서울의 변방, 답십리 1동 357번지, 판자 대문은 언제나 열려있었다. 문짝이 없는 마루, 문짝이 없는 부엌, 아니 부엌엔 그릇도, 솥도, 아무 것도 없었다. 집안은 온통 써늘한 분위기 속에 잠겨 있었다. 가끔 어디서 고양이가 음산을 떤다.
조심스럽게 미닫이를 열고 안방에 들어섰다. 어두컴컴한 속에 노부부가 마주 앉고 있었다. 입맛을 다시는 소리. 안 옹은 혼자서는 도무지 기동을 못한다. 전신불수. 방금 부인 이애경 여사(52세)의 손으로 점심을 들고 있던 참이었다. 바깥 인기척에도 방안에선 전연 무관심했다. 그만한 두께로 의식은 무디고, 생활은 피곤하고, 실의에 절어있었다. 안 옹의 말문은 닫힌지 오래다. 그의 의식은 오로지 살아 있을 뿐, 아무 기능도 못했다.
62년, 안 옹은 회갑의 연륜으로 몸져눕기 시작했다. 「신경성 고혈압」이 병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병을 아는 이는 술이라고 말한다. 「고고한 길」의 고달픔을 그것으로나 풀며 평생을 살아온 그였다. 예술인이 부자가 되기란 참말 「약대와 바늘구멍」같은 얘기-. 차근히 세상을 살아가자는 안씨의 성품으론 「자택」하나 간수하기도 힘이 들었다.
서울시 「문화상」을 받던 날(1958년), 금「메달」을 손에 들고 부들부들 떨더라는 이야기를 이 여사는 퍼그나 서글프게 기억하고 있었다. 금붙이를 손바닥에 쥐고있는 것이 그처럼 쑥스러웠던 것이다. 지금의 「자택」은 병상에서 지은 무허가 건물. 뜯기고, 헐리며, 발악하듯 지은 그 집엔 아직 문짝이 없었다. 온 겨울을 포장을 치고 지내다가 견디는 수 없어 방엔 간신히 미닫이를 해 달았다. 방바닥은 모래바닥 그대로, 젖은 일은 방안 웃목에서. 그나마의 생활비는 영화제작인들의 모임인 「제협」에서 매달 얼마씩 보태주는 것으로 꾸려 나간다. 병상에 약이 떨어진 지는 4년이 넘고-.
『그래도 한잠 주무시고 나면 이광수의 「흙」을 감독하시겠다고 가슴을 불룩불룩 하셨어요』「꿈속에서 눈물을 흘리는지」감긴 안 옹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자, 작년…만해도…그 분은 환상을 버리지 않았었어요. 꼭 일어나서 다시 「메거폰」을 든다는 거예요. 필생의 대작을 만들겠다는…』
얘기를 필화로 절규하던 것도 작년 일. 아마 예술에의 향수처럼 강인한 집념도 없을 것이다. 『이것 좀 보세요. 올 겨울엔 이걸 써놓더니…』 병은 영 깊어만 갔다고 한다. 아랫목에 누운 안 옹은 짓무른 눈을 크게 뜨며 이제 8살 짜리 장남을 쳐다본다. 감동도, 기쁨도, 그렇다고 슬픔도 없이 그저 담담한 무표정으로. 문풍지 우는소리가 방안을 흔든다. 「실로 형극고투의 들길」을 걸어온 것은 바로 그 자신의 길이기도 했다. <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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