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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미주 이민 100주년] 4. 뉴욕 한인 상인들의 성공 스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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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미국의 명절인 추수감사절 휴가 기간이던 지난해 11월 29일 오전 5시. 뉴욕의 풀턴 어시장은 서울의 노량진 수산시장이나 다름없었다.

시끌벅적한 좌판들 사이를 누비며 갈고리로 생선을 이리저리 들추고 있는 5백여명 중 절반은 한인들이다. 안경에 서리는 김을 연신 닦으면서 가자미.연어.황새치를 골라 흥정하던 바비 한(32)은 "두 시간 전에 왔다"며 "생선은 신선도가 떨어지면 손님의 반응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풀턴 어시장은 하루 거래액이 1백만 달러에 이르는 미국 최대의 어류 도매시장. 오전 2시부터 4시간 동안 열리는 이 시장을 찾는 고객의 절반은 뉴욕과 뉴저지, 인근 펜실베이니아 지역에서 1천여개의 생선가게와 횟집을 운영하고 있는 한인 소매상들이다. 이들이 풀턴 어시장에서 사들이는 생선은 하루 거래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어시장에서 만난 김정환 뉴욕한인수산인협회 회장은 "한인들이 풀턴 어시장의 도매상 한 곳을 찍어 불매운동에 나서면 그 도매상은 망해 버린다"고 단언했다. 어시장의 큰손인 한인 소매상들을 무시했다가는 큰코 다친다는 얘기다.

그러나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1821년 형성된 풀턴 어시장은 뉴욕 일대 생선가게를 차지하고 있던 이탈리아계 상인들을 배경으로 마피아들이 장악했던 곳이다. 金회장은 "16년 전 이곳에서 한 한인 소매상이 상한 생선을 사라고 강요하던 마피아들에 항의하다가 갈고리에 찔려 죽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피아의 위협도 한인들의 잡초 같은 생명력을 막지는 못했다. 18년 전 달랑 50달러를 들고 미국에 온 뒤 지금은 롱아일랜드에서 종업원 10명을 둔 대형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존 황(46)은 "그때 뉴욕으로 흘러들어온 한인의 절반 이상이 밀항 선원들이었다. 마피아든 뭐든 두려울 게 없었다"고 회고했다.

은행 대출도 받을 수 없었던 한인 밀항자들은 계를 조직해 돈을 모아 생선가게를 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한인들의 근면함에 이탈리아계 가게들은 차례차례 나가 떨어졌다.

한인들은 결국 뉴욕 일대 생선 소매상 1천4백여곳의 70%를 장악하며 풀턴 어시장의 최대 고객으로 떠올랐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한인 소매상들이 힘을 모아 중량 미달의 생선을 떠넘기던 풀턴 어시장의 도매상을 상대로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풀턴 어시장이 시작되는 오전 2시, 워싱턴 중심가의 플로리다 마켓에는 대형 트레일러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워싱턴 일대와 노스캐롤라이나.필라델피아 일부에 야채.고기.잡화 등을 공급하는 이 도매시장에서는 "빨리 빨리"가 표준말이다. 트레일러 기사와 아프리카계 상인들까지 "빨리빨리"라고 고함치며 히스패닉 짐꾼들을 재촉한다.

1백50여개 점포 중 한인들이 70여개를 운영하는 이곳은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흑인 슬럼가였다. 74년 이곳에 첫 한인 가게를 열었던 최상오 삼왕식품 대표는 "당시 60여개 점포 중 절반은 흑인들의 방화로 불에 탔거나 주인이 떠난 빈 가게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인들은 남들이 두려워하는 슬럼으로 들어가 가게를 24시간 지키며 기존의 유대계 점포들과 경쟁했다.

80년대 들어 한인 점포가 50여개로 늘자 워싱턴시의 시각이 달라졌다. 84년 당시 메리온 베리 워싱턴 시장은 직접 플로리다마켓을 찾아와 기념행사까지 하며 슬럼가를 상가로 되살린 대표적인 지역개발 사례로 선전했다.

풀턴 어시장과 플로리다마켓은 맨몸으로 지역 상권을 차지한 '독한 한인'들을 잘 보여준다. 하와이 호놀룰루의 '인터내셔널 마켓'에서 LA 중심가의 '자바 옷시장'에 이르기까지 미국 어디서나 몸뚱이 하나로 상권을 장악한 한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미국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한인 소유 업체들의 숫자는 72년 1천2백여개에서 97년 13만5천여개로 무려 1백12배로 늘었다.

그러나 기하급수적인 성장의 이면에는 안타까운 '한계'도 숨어 있다. 뉴욕 일대의 어류 소매상을 평정했지만 풀턴 어시장의 도매상 50곳 중 한인이 소유한 점포는 한 곳도 없다. 1백여년 동안 이곳을 지켰던 이탈리아계가 축적한 자본을 밀어낼 능력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한인들이 일궈놓은 워싱턴의 플로리다마켓에서도 중국계들이 과거 한인들의 무기였던 근면함을 앞세워 밀려들고 있다. 플로리다마켓의 중국계 점포는 한인 다음으로 많은 20여곳에 이른다.

97년 미국 정부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13만5천여개 한인 업체들의 연평균 매출액은 33만9천달러(4억여원), 평균 종업원수는 2.46명으로 미국 전체기업의 평균 매출액 89만1천달러와 평균 종업원수 4.96명에 상당히 뒤처진다. 중국.일본계 업체에 비교해도 밀린다.

한인 업체들 대다수가 백인 소유 기업들은 물론 같은 아시아계 업체들과 비교해도 규모가 적은 생계형 자영업 단계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문성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교수는 "한인들은 이민 초기 일단 먹고 살기 위해 손쉽게 생업으로 삼을 수 있는 식당.청과상.생선가게 등의 단순 소매업종에 대부분 뛰어들었다"며 "이제는 자본 축적과 업종 다변화를 통해 한 단계 뛰어올라야 할 시기"라고 지적했다.

뉴욕=신중돈.변선구.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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