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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전성기 한국영화 앞길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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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8일 개봉한 '조폭 마누라'가 개봉 9일만에 2백만명을 넘는 흥행 행진을 하고 있다. 관객수로 영화를 들여다보는 것이 문화 상품을 시장의 잣대로만 재는 이른바 '경마식 보도'의 함정에 빠지는 우(愚) 를 범한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1년 새 '공동경비구역 JSA''친구''엽기적인 그녀''조폭마누라'로 이어지며 '더 높이 더 높이' 도약하는 기세는 한국영화를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읽기를 요구한다.

'조폭 마누라'의 약진을 두고 일각에서는 "이처럼 질낮은 코미디에 관객들이 몰린다면 한국 영화의 미래는 암울할 수 밖에 없다"며 우려한다.

이런 지적에 타당성이 없는 건 아니나 그렇다고 '조폭마누라'와 관객의 저열한 감각에 모든 책임을 씌우는 건 편파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조폭마누라'의 영화적 컨셉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제작자가 얼마나 될 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 시점에서 '조폭마누라'가 던지는 문제는 한국의 액션영화가 급격히 뒷걸음질 치고 있는 조짐을 이 영화가 보여준다는 데 있다. 특히 근래 조직폭력배를 다룬 영화(조폭영화) 의 붐 속에서 '조폭마누라'가조폭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식상함을 부채질하는 촉매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조폭영화는 왜 어떻게 태어났으며, 앞으로의 생존 전략은 무엇일까.

◇ 돈.돈.돈='게임의 법칙'(94년) 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조폭영화는 '넘버3''초록물고기''비트''친구''파이란''신라의 달밤' 등으로 이어지면서 10년 가까이 흥행 장르로서의 지위를 누려왔다. 올 후반기에도 '달마야 놀자' '두사부일체' 등 조폭영화의 목록은 당분간 계속 이어질 태세다.

조폭영화는 고전적인 활극(活劇) 영화와는 여러 점에서 구분된다.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시리즈(90~92년) 나 1960년대 유행했던 박노식.허장강.장동휘가 보여준 주먹 세계는 의리와 우정.명예를 우선적으로 강조했다.

이들은 주먹 하나로 현실 세계에서 정의를 세우려는 듯 무모하고 순진한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조폭영화의 주인공들이 활보하는 공간은 음모와 폭력이 판치는 도시의 뒷골목이며 이들은 오직 세속적 욕망, 즉 돈과 권력을 위해 부하들을 조직하고 폭력을 이용한다. '넘버3'의 불사파 두목이 '벤츠 타고 룸 살롱 안방 드나들듯 할 거야'라고 호언하는 장면은 조폭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 왜 '어깨'들인가=영화평론가 곽한주씨는 영화전문지 『필름 컬처』 제4호에서 90년대에 조폭영화가 융성하게 된 토양을 한국 사회가 급격히 소비사회로 전환한 것에서 찾았다.

정치적으로는 군부 독재가 사라지고 경제적으로는 '단군이후 처음'으로 풍요를 누리게 된 이 시기에 역설적으로 남성의 소외가 더 깊어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계화'의 뒤안에서 직장에서는 컴퓨터.영어 등 생존기술을 터득해야하는 압박에 시달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권신장으로 가부장적 기득권이 흔들리는 사태를 맞아 무력감이 배가될 수 밖에 없었다.

조폭영화는 이처럼 위축된 남성성이 허구적으로나마 스크린에서 폭발하게 함으로써 이들에게 안식처 구실을 했다. 또 TV드라마 '모래시계'(95년) 가 묘사했고 최근의 '이용호 게이트'에서 보듯 현실 정치는 조직폭력배와 결탁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정치 권력을 비판하는 알레고리 기능도 가졌다.

◇ 야쿠자 vs 조폭=조폭영화는 장르적 유사성으로 볼 때 할리우드의 갱스터무비나 홍콩 누아르, 일본의 야쿠자 영화와 닿아 있다.

이 중에서도 야쿠자 영화와 친화성이 강하다. 야쿠자 영화는 보스에 대한 충성과 개인의 명예를 중시하는 사무라이 영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60년대와 7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주인공들은 조직을 위해 검과 주먹으로 상대 패와 일대 격전을 벌였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개 주인공의 비장한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야쿠자 영화는 시대착오적인 탐미주의와 함께 나름대로의 폭력 미학을 구축했다.

야쿠자 영화 덕에 일본영화는 쇠퇴의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작년 한국에서 개봉한 '철도원'의 주인공 다카쿠라 켄 같은 야쿠자 영화의 스타를 배출하기도 했던 이 장르는 최근에는 '소나티네''하나비'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를 통해 맥을 잇고 있다.

◇ 참을 수 없는 매력=장 뤽 고다르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자와 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섹스와 폭력(액션) 이 스크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빗댄 말이지만, 숱한 비난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의 폭력 장면은 해가 갈수록 점점 강도를 높여 왔다.

'스타워즈''터미네이터''아마게돈''인디펜던스 데이' 등 역대 할리우드의 흥행 수위권에 든 영화들이 하나같이 부수고 치고 박는 액션물이라는 점은 액션이 빠진 흥행물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조폭영화가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지나치게 많이 제작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장르에 비해 편중 현상을 보이는 건 분명 개선돼야 하겠지만 그건 시장의 논리가 자연스레 풀어줄 것이다.

조폭영화가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의 폭력에 둔감하도록 만들며 폭력배를 미화한다는 점은 좀 더 까다로운 문제다. 아쉽지만 그건 제도적 장치와 영화 자체의 기능에 맡길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결국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일본에서의 야쿠자영화처럼 조폭영화가 한국영화의 고유 장르로서 하나의 미학적 구성체를 갖추기도 전에 이종(異種) 들이 득세한다는 점이다.현실과의 접점을 놓친 채 불필요한 폭력 장면을 과도하게 삽입하고 조폭을 희화화할 때 이 장르의 수명이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건 분명하다.

사이더스의 차승재 대표는 "홍콩영화가 쇠퇴한 데는 '황비홍'같은 무협액션물이 잘 나가자 너도나도 아류작들을 양산한 데 있다"며 "자칫 한국도 이런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며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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