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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이인제와 김대업이 없지 않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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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철호
논설위원

‘깜깜이 대선’이다. 오죽하면 초등학생 말에 귀를 기울일까 싶다. 한 어린이가 신문 1면 사진을 보고 “게임 끝났네”라 했다. 유세장에 한 후보는 손바닥을 활짝 펴 팔을 흔들고, 다른 후보는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치켜든 모습이다. “가위·바위·보를 하면 보가 바위를 이기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우스개에 귀가 솔깃할 만큼 박빙의 판세다. 물론 간접지표가 없는 건 아니다. 돈이 걸린 주식만큼 예민하게 냄새를 맡는 곳도 없다. 어제 박근혜 테마주는 올랐지만, 문재인 테마주는 하한가가 많았다. 그럼에도 주가나 여론조사는 숫자일 뿐이다. 투표율도 남은 변수다. 이번엔 정말 투표함을 까봐야 알 듯싶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하 경칭 생략)은 일찌감치 그해 대선에 비관적이었다. 원광대 특강에서 “호남+충청 구도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긴다”고 했다. 그는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보수·영남 표를 분산시킬) 이인제가 없지 않은가”라 반문했다. 여기에다 이번 대선엔 두 가지가 더 실종됐다. 우선 ‘제2의 김대업’이 없다. 병풍(兵風)은 흑색선전의 결정판이었다. 지금 여야의 네거티브는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 병풍은 차원이 다른 대량 살상무기로 가공할 파괴력을 보였다. 또 하나, 충청표를 확실히 유인할 ‘수도 이전’ 같은 화끈한 카드도 없다. 이른바 4무(無) 대선이다.

 그럼에도 문재인이 대선판을 박빙까지 끌어올린 것은 대단한 힘이다. 안철수가 없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를 불쏘시개 삼아 2030세대를 합쳤고, 여기에다 이정희 사퇴로 왼쪽 표까지 알뜰하게 긁어모았다. 반대편인 보수진영의 표도 똘똘 뭉쳤다. 이번엔 이인제와 정몽준 같은 변수가 없다. 양쪽 다 모을 만큼 모은 셈이다. 대선 구도가 유례없는 세대 대결, 보-혁 전면전으로 굳어진 것이다. 하지만 대선이 이런 정면충돌로 가는 게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박근혜는 시대교체, 문재인은 정치교체를 외친다. 마치 약체 후보들의 설익은 고함처럼 들린다. 미국의 공화당은 원래 동북부를 무대로 한 개혁파였다. 1860년 노예제 폐지를 내건 에이브러햄 링컨이 공화당의 간판이다. 민주당은 오랫동안 소수파의 굴욕을 감수했다. 극적인 반전은 1929년 대공황을 틈타 이뤄졌다.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딜’로 미 동북부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이후 공화당은 40여 년간 숨죽여 살았다. 공화당은 베트남 전쟁 이후 보수화 물결에다 근거지를 중남부로 완전히 옮긴 뒤에야 반격 기회를 잡았다. 환골탈태(換骨奪胎)도 이쯤 돼야 정치교체·시대교체의 반열에 오르지 않을까.

 내일 투표에서 누가 이겨도 절반의 승리에 지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이번에도 양쪽은 유권자의 이성적 판단보다 지역색·이념 같은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데 치우쳤다. 전통적 텃밭에서 현금출납기처럼 표를 인출하는 장면은 신물이 날 정도다. 양쪽 모두 중간 부동층을 노린 구애에 매달리고, 미래의 희망보다 상대방의 실수로 득점을 올리는 데 골몰했다. 무엇보다 박·문 모두 유산(遺産)의 정치에 기생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 이들은 정치적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정치적 기반을 쌓아 올린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이런 약체 후보들이니 정책공약은 말의 홍수 속에 묻히고, 휘황찬란한 포퓰리즘으로 허약한 리더십을 덮기에 급급했다.

 내일 오히려 어느 쪽이 질지를 더 눈여겨 봤으면 한다. 이긴 쪽은 승리에 도취해 그냥 가기 십상이다. 승리를 거머쥔 순간 계파 이익에 치우쳐 인사불성이 되는 장면을 우리는 지겹도록 기억한다. 패자는 물론 가혹한 운명에 처할 것이다. YS·DJ 같은 패자부활전도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환골탈태는 항상 섶에 누워 쓸개를 씹어가며 재기를 노리는 진 쪽의 몫이었다. 늙어가는 표심에 의지하고, 투표율이 높아질까 전전긍긍하는 새누리당은 비굴하게 보인다. 민주당도 언제까지 “이인제가 없다, 김대업이 없다”며 정치공학에 매달릴 게 아니다. 현재 구도를 고집하며 새 정치와 시대교체를 외치는 건 우리 모두를 조롱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