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강해야 나라가 흥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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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분명히 밝혀둬야 할 개념이 있다.

우선 이 책에서 다뤄지는 '문화(culture) ' 라는 말은 '문화예술' 을 뜻하는 좁은 의미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만을 스쳐 보고 "문화예술 분야의 교양서인가?" 했다면 그건 착각이다. 하긴 헌팅턴 자체가 군사정치학.비교정치학 분야가 전공이고, '문명의 충돌' 등 굵직한 거대 담론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능한 스타급 학자 아닌가.

『문화가 중요하다』(원제 Culture Matters) 는 제목과 달리 성장이론.근대화론에 관한 다소 포괄적인 성격의 연구서다.

책에서 다뤄지는 문화라는 어휘는 '한 사회 내의 가치와 태도.신념 등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 .

따라서 이 책이 옹호하는 명제는 "검약.투자.근면.교육 등이야말로 하나의 가치이자 문화며, 이런 가치를 높이 여기는 풍토를 가진 국가는 효과적인 경제발전을 할 수 있다" 는 것으로 요약된다.

다소 밋밋해보일까?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성장 관련 이론의 각축장에서 재등장한 이 문화의 패러다임론에는 '파워게임의 흔적' 이 역력하다.

즉 한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법률 등 제도적 요소나, 기후 등 자연적 요소보다 문화가 더 중요한 요인이라는 식의 설명은 50년대 전후만해도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루스 베네딕트 등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이런 문화 패러다임론은 70년대 급격한 썰물현상을 거쳐, 이후 발언권을 다시 획득하게 됐다. 분위기를 탐색하기 위해 책의 서문에 쓴 헌팅턴의 말을 들어보자.

"90년대 초 나는 가나와 한국의 60년대 초반 경제자료들을 검토하게 됐는데, 당시 두 나라 경제상황이 비슷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무엇보다 양국의 1인당 GNP 수준이 비슷했고, 농산품의 경제 점유율이 아주 유사했다. 이후 30년 뒤 한국은 세계 14위의 경제규모를 가진 산업 강국으로 부상했다. 국민소득은 그리스 수준이고, 민주제도를 다져나가고 있다. 반면 현재 가나의 GNP는 한국의 15분의 1 수준이다. 이런 엄청난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역시 '문화' 가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

이 책은 99년 초 미국 하버드대 국제지역연구학회가 중심이 된 대규모 심포지엄 '문화적 가치와 인류발전' 이 토대가 됐다.

제프리 삭스(하버드대) , 프랜시스 후쿠야마(조지 메이슨대) , 마이클 포터(허버드대) , 로널드 잉글하트(미시건대) 교수 등 스타급 연구자들의 당시 발제 논문들을 중심으로, 모두 22편의 글들이 연구자별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문화결정론의 틀을 잡아가고 있다.

집필자 중 다소 예외적으로 제프리 삭스만이 지리와 기후의 중요성에 비해 문화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소수의견' 을 내놓고 있다.

어쨌거나 데이비드 랑드(하버드대) 의 말대로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필자들은 알렉시스 토크빌과 막스 베버의 후예들이다.

토크빌은 미국의 정치체제를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핵심 요인을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문화적 기반' 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 문화론자다. 베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본주의의 발흥이 본질적으로 종교(개신교) 에 바탕을 둔 문화적 현상이라고 짚었던 것이 그였다.

문제는 헌팅턴과 그를 따르는 학자들에게선 계몽시대의 토그빌이나 베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노골적 보수의 분위기가 풍긴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상당수의 대목들도 그렇지만,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특히 서구의 자기만족 분위기가 강하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이 책은 'WTO체제 하의 성장이론서' '신자유주의적 자기만족의 발전론' 등의 지적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그것은 정말 작지 않은 문제고, 이 책의 지평을 넘어서는 사안이다.

마르크시즘에 뿌리를 둔 식민주의이론, 좌파적 유사(類似) 파생이론인 종속이론 등 제3세계의 저개발을 이념의 각도와 인종차별주의의 결과로 설명하는 대부분의 이론들이 정말 이 책의 주장대로 이제는 시효 만기된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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