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1만 년간 겪어온 일…남자들, 패닉에 빠질 것 없어”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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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개미제국의 발견' 등을 쓴 최재천(58·사진)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여성시대’를 일찌감치 예언한 학자 중 하나다. 저서'여성시대에는 남성도 화장을 한다'(2003)에서 그는 “유연성과 감성, 다양성이 21세기 문화코드로 등장하면서 이러한 요소를 두루 갖춘 여성적 가치가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썼다. 12일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현재의 여성우위 현상에 대해 “그동안 남성 쪽으로 과도하게 기울어져 있던 힘의 균형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성의 위기’라는 지적에 공감하나.
“위기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본다. 21세기는 여성들이 제자리를 찾는 시대가 될 거다. 사실 남성이 주도권을 잡은 건 현생 인류 25만 년 역사에서 최근 1만 년밖에 안 된다. 수렵·채집 시절엔 그렇지 않았다. 사냥은 힘센 남자가 했지만 허탕 치는 날이 많았다. 여자가 채집하는 먹거리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더 많았다. 남성의 발언권이 세지 않았던 거다. 농경시대가 되면서 달라졌다. 농사가 워낙 고달픈 노동이다 보니 남자 역할이 커졌고 남자는 수확물을 곳간에 쟁여 열쇠를 차지했다. 산업혁명 이후 한참이 흐른 지금은 두뇌와 정보력, 네트워킹 능력, 공감 능력 등이 필요한 산업이 주력이 됐다. 여성이 눌릴 이유가 없다. '제1의 성'을 쓴 인류학자 헬렌 피셔 같은 학자는 “21세기엔 경제권도 여성이 가져간다”고 단언할 정도다. 그동안 눌려 있던 여성의 능력이 시대 변화와 더불어 드러났을 뿐이다. 남자들은 패닉에 빠질 것 없다. 여자들은 지난 1만 년 동안 겪어온 일이니까.”

-사회생물학, 즉 남녀의 유전자 차이로 남자의 위기를 본다면.
“유전자도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거지, 유전자가 다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포유류 암컷과 수컷의 성염색체는 XX와 XY로 다르다. XY는 XX에서 한 부분이 떨어져나간 거다. 이 모자란 부분 때문에 남성이 특정 질병에 여성보다 훨씬 취약하다는 걸 수많은 의학 자료들이 보여준다. 암컷 쥐와 수컷 쥐를 똑같이 굶기면 수컷이 훨씬 먼저 죽는다. 진화론으로 얘기하면 암컷은 새끼에게 젖을 먹여야 하니 에너지를 축적·관리해 적절히 쓰는 능력이 발달한다. 그럴 필요가 없는 수컷은 에너지를 한번에 확 써버리는 습성이 있다. 인간 수명이 짧았을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특성이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남성이 예전엔 노출될 필요가 없던 일에 자꾸 노출되니 적응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환경 변화에 남성의 적응력이 더 떨어지는 이유를 좀 더 설명해 달라.
“속성의 차이가 있다. 수컷은 무모한 동물이다. 수컷의 목표는 어떻게든 암컷의 선택을 받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물려주는 거다. 암컷은 그 유전자를 받아 잘 키워내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지향적이다. 이런 특성이 요즘처럼 취업에서 성적을 중요시하는 상황에선 불리할 수밖에 없다. 학습 태도·학교 생활 등을 고려해 다면평가를 하는 요즘 추세에선 여학생을 따라가기 힘들다. 정규분포곡선을 그려보면 수컷은 변이의 폭이 굉장히 크고, 암컷은 평균 주변에 몰려 있는 식이 된다. 대체로 우수한 성취를 보이는 비율은 여자가 높지만 아주 뛰어난 두뇌가 나오거나 흉악한 범죄자가 나올 확률은 남자가 더 높다는 얘기다. 미국의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이 하버드대 총장 시절 “여자는 태생적으로 남자보다 수학·과학을 못한다”고 말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서머스는 남녀차별주의적 발언을 한 게 아니라 통계학적으로 본 것이었다.”

-실제로 우수한 여학생이 많아진 걸 체감하나.
“남녀공학 두 군데, 여학교 한 군데에서 강의를 해봤다. 경험상 여학교 학생들이 제일 공부를 열심히 한다. 남녀공학에선 남학생들이 대개 C학점이나 D학점을 받으니 여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웃음). 반면 여학교는 거의 전원이 열을 올려 공부하는 분위기다.”

-대기업 인사담당자들이 ‘성적대로 뽑다 보면 남자 수가 너무 적어진다’며 일부러 남자를 배려한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추세로 가다 보면 우리 사회도 선발 기준을 바꾸든지 남자를 위해 쿼터를 두는 식으로 가지 않겠나. 인위적 조작이라고만 볼 게 아니다. 다양성을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하다면 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의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소수자 배려)이 흑인과 여성을 배려했듯 말이다.”

-여성이 육아와 업무를 병행해야 하는 현실에선 여성우위가 실감 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맞다. 그래서 능력 있는 여성들이 많아지는 21세기엔 저출산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출산율 제로’가 된다 해도 놀랄 게 없다. 극단적으로 표현해 머리 좋은 여성이라면 지금 같은 육아환경에서 아이를 낳을 이유가 없다. 일하는 데 불리하고 승진에 불리하고 삶도 고달프다. 그래서 나라가 제도적 뒷받침을 해야 하는데 초점을 지금처럼 여성한테만 맞춰선 안 된다. 육아휴직을 남자도 쓰게 해야 한다. 육아는 남녀 공통의 몫이란 인식이 퍼져야 저출산 문제가 풀린다. 임신·출산도 고통스러운데 육아 부담도 여성 혼자 지게 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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