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휩쓴 한국의 '박만복 세탁기' 뭔가보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7면

페루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박만복 감독(가운데)이 지난 5일(현지시간) 페루 찬차마요 가전양판점에서 대우일렉 고객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사진 대우일렉]

칠레 양문형 냉장고 1위, 베네수엘라 전자레인지 1위, 페루 양문형 냉장고·드럼세탁기 1위….

 올해 중남미에서 이런 성적표를 받아 든 한국 가전업체가 있다.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대우일렉(옛 대우전자)이다. 이 회사 이상봉 경영혁신본부장(상무)은 10일 “올해 워크아웃 이후 사상 최대인 매출 1조9000억원을 돌파할 전망”이라며 “중남미 시장에서의 선전이 이러한 실적의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대우일렉의 중남미 시장 성공 요인은 ‘현지인 눈높이에 맞추기’로 요약된다. 이 회사는 지난해 초 해외 매출 확대를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그동안 매출 확대 TF는 해외영업 담당자들만으로 꾸려져 ‘어떻게 팔지’를 논의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 TF에는 마케팅 부서 외에 연구개발(R&D), 홍보 분야 임직원들이 가세했다. 팀원들은 ‘어떻게 만들어야 팔릴지’부터 논의했다. 이들은 인맥을 총동원해 현지와 20년 이상 거래한 무역업자를 찾아내 중남미 소비자들의 특성과 시장 트렌드를 파악했다.

올해 페루에서 세탁기 1위를 차지한 나스카(Nazca) 문양의 제품도 이 TF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출발이 됐다. 나스카 문양은 페루 평원에 그려진 거대한 그림이다. 대우일렉 관계자는 “중남미인들은 소득은 높지 않지만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매우 높다. 이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문양을 세탁기에 새겨 넣자 현지 바이어들은 ‘무조건 팔릴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전했다. 실제 나스카 문양 세탁기 덕에 대우일렉의 페루 세탁기 시장 매출은 1년 새 60%가 늘었다. 올 상반기에는 이 문양을 적용한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도 출시했다. 칠레에서는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을 새긴 양문형 냉장고가 판매 1위에 올랐다.

 ‘현지 맞춤’이 대우일렉의 전략이 된 건 2009년 멕시코에서의 성공이 계기가 됐다. 이 회사는 멕시코 시장에 복합 오븐 ‘쉐프 멕시카노(Chef Mexicano)’를 출시했다. 10여 가지 멕시코 전통 요리를 자동메뉴 버튼을 눌러 쉽게 조리할 수 있는 제품이다. 쉐프 멕시카노는 시장에 나오자마자 멕시코 복합 오븐 시장 2위(24%)에 올랐다. 대우일렉은 쉐프 멕시카노의 성공 전략을 페루시장에 적용해 올 초 페루 전통요리 조리 기능을 갖춘 복합 오븐 ‘쉐프 페루아노’를 출시했다.

 중남미인들이 스포츠를 좋아한다는 점을 고려해 스포츠 마케팅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페루에서는 37년째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박만복 감독이 대우일렉 모델로 활동 중이다. 박 감독은 페루 여자배구 대표팀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올림픽 은메달로 이끌어 ‘페루의 히딩크’로 불린다. 최근 페루 찬차마요 지역에서 열린 박 감독 사인회에는 300여 명이 몰렸다. 대우일렉은 페루에서 60여 개 팀이 참가하는 박만복배 배구대회도 3년째 개최하고 있다.

 대우일렉은 전체 매출의 80% 이상을 수출에서 올린다. 해외 판매 3대 가운데 1대 이상을 중남미인들이 구입한다. 현재 대우일렉은 멕시코·파나마·칠레·브라질·아르헨티나 등에 판매 법인과 지사를 두고 있다. 대우일렉 관계자는 “멕시코에 공장이 있는 데다 중남미 가전 시장이 커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그동안 중남미에 각별히 공을 들여왔다”며 “내년부터는 중남미에서의 성공 경험을 토대로 다른 지역의 매출 확대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