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쏜 화살’에 스러진 46세 英 간호사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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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왕세손빈이 입원한 병원에 전화를 건 방송 진행자 멜 그레이그(왼쪽)와 마이클 크리스티안. [AP=연합뉴스]

언론의 취재 윤리는 어느 선까지 지켜져야 하는 것일까.

영국 왕실을 가장해 왕세손빈의 치료 정보를 알아낸 뒤 이를 방송한 호주 방송 진행자와 방송사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이들의 장난전화에 속아 정보를 알려준 간호사가 7일(현지시간) 숨진 채 발견되면서다.

임신 초기 증세로 에드워드7세 병원에 입원했다가 6일 퇴원하고 있는 캐서린 왕세손빈. [로이터=연합뉴스]

숨진 간호사는 런던 에드워드7세 병원에서 4년 넘게 일하던 재신다 살다나(46)로 두 아이의 엄마다. 이날 오전 9시35분쯤 병원 인근 사택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는데, 앰뷸런스가 도착했을 땐 사망한 상태였다. 런던 경찰은 자살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살다나는 4일 오전 5시30분 당직근무 중에 호주 시드니 라디오 방송 2데이FM 진행자들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 교환원이 없는 새벽이어서 직접 전화를 받았더니 전화기에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왕의 목소리를 흉내 낸 방송진행자 멜 그레이그가 “손자 며느리와 통화를 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살다나는 “잠시만 기다리세요”라고 답한 뒤 담당 간호사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찰스 왕세자로 가장한 동료 진행자 마이클 크리스티안과 그레이그는 담당 간호사로부터 “구토 증상은 없으며 잠이 들었다 깼다 하는 상황”이란 말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지난해 4월 평민 출신으로 윌리엄 왕세손과 결혼한 캐서린(케이트) 미들턴은 임신 12주 미만으로 알려졌다. 캐서린 왕세손빈은 구토·탈수를 동반한 심한 입덧 증상으로 에드워드7세 병원에 나흘간 입원한 뒤 6일 퇴원했다.

방송 진행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쉽게 성공한 장난전화”라며 농담으로 방송을 이어갔다. 방송 후엔 트위터에 “우리 억양이 엉망이었는데도 연결이 됐고 전 세계의 화젯거리가 됐다”고 떠벌렸다. 해당 방송국은 한 술 더 떴다. 자사 홈페이지에 ‘사상 최고의 왕실 놀리기’란 제목으로 방송 다시 듣기 서비스를 제공했다.

영국 왕실과 가족 치료를 담당한 에드워드7세 병원은 발칵 뒤집혔다. 병원 측은 “환자 정보를 외부에 유출한 건 중대 문제”라며 “전화 응대 과정에서 규정 위반이 없었는지 조사 중이고 전화교환 시스템을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실수로 전화를 연결시킨 살다나는 전화 소동과 관련해 징계를 받진 않았다. 하지만 심적 부담이 컸다고 한다. 그는 주변에 “외롭고 혼란스럽다”는 심정을 밝혔다고 한다.

이 병원의 존 로프트하우스 병원장은 7일 살다나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살다나에게 병원 측은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다. 애꿎은 장난전화로 훌륭한 간호사이자 동료를 잃은 건 충격적 비극”이라고 말했다.

해당 라디오 방송국은 비난 여론의 중심에 섰다. 8일 방송국 페이스북 계정엔 방송사와 진행자를 비난하는 글이 1만여 건 이상 올랐다. 대부분 진행자의 즉각 해고를 요구하는 내용이다. “앞으로 (영국·호주) 양국 관계가 걱정이다”란 글이 줄을 이었다. 내용 중엔 “라디오 진행자가 윌리엄 왕세손의 어머니인 고 다이애나비를 죽음으로 몰고 간 파파라치들과 다르지 않다”는 비난도 포함됐다. 시드니 방송의 최대 광고주인 대형 수퍼마켓 체인 콜스는 “2데이FM의 장난전화가 몰고 온 비극적 결과에 호주인들은 매우 분노하고 있다. 방송사에 대해 광고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방송국 측은 “두 진행자들이 깊은 충격에 휩싸였고, 방송에 복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입장을 밝혔지만 논란은 확산되고 있다.

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는 살다나 간호사의 죽음이 “끔찍한 비극”이라고 유감을 표했다. 스테판 콘로이 통신담당 장관은 “이번 방송이 민영 라디오방송 규정을 위반했는지 알아보는 조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왕세손 부부는 살다나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왕실 대변인을 통해 “깊은 슬픔을 느낀다”며 애도를 표했다. 그러면서 장난전화 소동에 대해 살다나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왕실 대변인은 “왕세손 부부는 에드워드7세 병원의 모든 직원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며 “(장난전화) 사건에 대해 한 번도 불평을 제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병원 간호사들을 진심으로 지지했다”고 밝혔다.

윌리엄·캐서린 왕세손 부부와 미디어 측의 악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9~10월엔 유럽 지역 가십 잡지들이 왕세손빈의 파파라치 노출사진을 실으면서 곤욕을 치렀다. 분노한 영국 왕실은 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다.

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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