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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개혁·개방, ‘김정일 유훈’ 명분에 밀렸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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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호 06면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오른쪽 둘째)이 지난달 19일 제534군부대 기마훈련장을 찾아 말을 타고 있다.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오른쪽)의 말 이마장식에 다른 군 간부들과 달리 김정은의 것과 유사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왼쪽부터 현영철 군 총참모장, 최용해 총정치국장.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를 앞두고 평양 권력 핵심부의 움직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사일 발사란 강경 카드를 내민 속사정과 이를 둘러싼 파워엘리트 간의 힘겨루기에 대한 궁금증이다. 북한은 1일 로켓 발사를 예고하면서 ‘김정일의 유훈(遺訓)’임을 강조했다. 1980년대 김일성 주석이 “우리도 이제 인공지구위성을 쏘아 올릴 때가 됐다”고 ‘교시’한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이어진 로켓 발사 성공 목표를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이어받아 간다는 논리다.

로켓 발사 초강수, 북한의 속사정은…

정부 당국과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로켓 발사 결정에 이른바 ‘후견 3인방’이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고모인 김경희 노동당 비서와 고모부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그리고 최용해 군 총정치국장이다.

특히 김경희·장성택 부부는 김정은의 후견그룹 가운데 친인척이란 강점을 갖고 있다. 권력기반이 취약하고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28세 김정은이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런데 김경희는 최근 싱가포르에 신병을 치료하러 가는 등 건강문제가 있다. 김정은의 최측근 보좌역인 장성택의 역할에 당국이 주목하는 이유다.

장성택은 김정일 사망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다. ‘만년 2인자’란 굴레를 벗어 던진 모양새다. 김정일 장례식장에 그는 대장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 일부 군부 인사가 “쟤는 뭔데 군복을 입고 설치나”라며 비아냥거렸다는 첩보도 있었다. 하지만 숨통이 트인 장성택의 강화된 위상을 보여준 상징이란 분석이 나왔다. 그는 장례운구차 행렬에서 김정은 바로 뒤에 서서 후계권력의 핵심 후견세력임을 과시했다.

김경희·장성택·최용해 ‘후견 3인방’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지난달 19일 김정은은 평양 근교의 제534 군부대 직속 기마중대를 찾았다. 훈련장을 돌아본 그는 흰색 반점이 드러나는 회색빛 준마에 올랐다. 관계당국의 북한 분석관들이 주목한 건 장성택의 모습이었다. 장성택은 말에 탄 채 김정은과 거의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의 말 고삐와 이마 끈 등에는 다른 당·군 간부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문양과 장식이 드러났다. 특히 말 이마 부분에 새겨진 대형 별은 김정은의 말에 원수 계급장이 달린 것과 유사했다. 한 관계자는 “장성택이 김씨 일족의 멤버란 걸 확인해 주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장성택은 지난달 4일 신설된 국가체육지도위원장에 올랐다. 김경희를 제외하고 노동당 비서 전원이 멤버로 구성되는 조직의 수장이다. 백승주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체육지도위를 거머쥔 건 마치 노태우씨가 대선 가도를 달릴 때 88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걸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단순한 체육 관련 조직이 아니라 신진 파워엘리트를 망라한 권력기구 성격이 엿보인다는 지적이다. 체육지도위에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등 다수의 체육계 인사 이름이 빠진 건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장성택을 만나본 정부 당국자나 북한 전문가들은 그가 개혁·개방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본다. 소련 유학을 했고 빈번한 외유를 통해 서구 문물에 대해 밝은 편이기 때문이다. 2002년 10월에는 경제시찰단으로 9일간 한국의 산업시설을 돌아봤다. 당시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화폐개혁 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2010년 1월 처형)이 단장이었지만 실세는 장성택이었다. 안내를 맡았던 관계자는 “시가 100만원이 넘는 발렌타인 30년산 양주로 폭탄주를 만들어 먹자고 하는 등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고 말했다. 장성택의 폭음 때문에 이튿날 출발 일정이 늦어져도 북측 인사 누구도 장성택을 깨울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다. 당국자는 “장성택이 뒤늦게 문을 열고 나서면 70대 장관급 노간부들이 벽에 찰싹 달라붙어 길을 내줄 정도로 기세등등했다”고 귀띔했다. 삼성전자를 방문했을 땐 장성택이 김치냉장고에 관심을 보이자 정부는 판문점을 통해 시찰단 참가자에게 각각 한 대씩 선물로 보내줬다는 후문이다.

주민 불만 폭발 땐 ‘장성택 숙청’ 카드?
김정일이 살아 있을 때 장성택은 당 수도(首都)건설부장을 맡아 평양시 현대화사업을 총괄했다. 김정은 시대 들어선 대중국 경협 문제를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8월 그는 베이징을 찾았다. 북·중 합작으로 추진되는 황금평 개발 프로젝트와 나선특구 개발 사업을 중국 지도부와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장성택은 식량을 포함한 대규모 경제원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것으로 우리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막대한 외화벌이 사업을 차지하고 있는 군부의 돈줄 죄기에도 장성택이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7월 중순 이영호 총참모장의 전격 숙청에도 장성택을 비롯한 후견그룹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어린 후계자의 ‘군부 과외교사’ 역할을 맡겼던 인물을 하루아침에 내쫓을 만큼 장성택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됐다는 평가다.

하지만 장성택이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정은 체제가 개혁·개방으로 가도록 물꼬를 트기에는 역부족이란 얘기다. 6·28조치로 불리는 김정은 식 경제개혁도 공표하지 못한 채 내부 시범 실시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 당국자는 “김정은이 지난 9월 ‘자본주의를 논하는 자들은 짓뭉개버리라’고 지시한 것으로 안다”며 “최근에는 농업개혁을 건의했던 교수·전문가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는 첩보도 나온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이영호 해임 이후 불어 닥친 무차별 숙청 사태에 간부들이 사생결단의 충성경쟁을 벌이는 상황이라 장성택도 운신 폭이 넓지 않다는 분석이다.

그래선지 지난 4월 이후 8개월 만에 강행하는 미사일 발사에도 장성택이 문제 제기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정부 당국자는 “장성택은 미국은 물론 중국 측과도 마찰이 불가피하고 대북 제재로 인해 경제난이 심화될 가능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김정일의 ‘유훈’을 앞세운 강경파들의 발사 강행론에 이견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장성택이 김정은 체제 구축 과정에서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고 점친다. 농업개혁이나 외자유치 등이 불발에 그치고 식량난 때문에 김정은 체제에 대한 주민 불만이 폭발할 경우 ‘장성택 숙청’이란 극단적 카드로 사태 수습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국자는 “김정일이 아들에게 가르친 제왕학의 핵심부분 중 하나는 장성택을 어떻게 다루느냐였을 것”이라며 “언젠가 장성택을 제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을 김정은에게 각인시켰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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