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우 전총리 특별기고] '서비스강국 이렇게 만들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세계경제의 판도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

정보화.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국경을 초월한 경제활동과 경쟁이 확대되고 있고, 다국적 기업들은 경영자원을 세계적으로 배치해 경영 효율을 극대화하고 가격.품질.상품개발에서의 선두를 다투고 있다.

국제 분업의 양상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선진국은 금융과 기술 분야에서 막강한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고 개도국은 선진국 혹은 중진국으로부터 노동 집약적인 생산을 이어받아 고속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국과 같은 중진국은 한편으로 선진국을 따라잡기 힘겹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도국의 추월에 대비해야 하는 이중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필자는 최근에 중국 창춘(長春)을 다녀온 일이 있다. 수년 전에 갔을 때와 너무나 달라져 중국의 발전 속도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어느 자동차 부품공장에 안내돼 그 회사 사장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근로자임금은 모든 간접 급여를 포함해 월 평균 2백달러 정도고, 공장 부지는 정부로부터 50년간 임대를 받고 공업단지 부대 비용을 포함해 연간 ㎡당 33달러(약 13만원)의 임대료를 낸다고 한다.

공업단지 면적은 엄청나게 광대하고 넓은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는데, 토지가 국유이니 공공 시설을 건설하는 데 지가보상.지가 상승.토지 투기 따위의 문제가 없고 주민들의 반대도 있을 수 없다.

장차 우리 제조업이 어떻게 될까 - .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기야 중국 경제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사구시' 의 스타일로 진통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성장의 열기는 식지 않을 것이다.

여러 연구기관의 전망에 따르면 중국의 경제규모가 앞으로 10년 내지 20년 내에 미국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분명히 중국은 공업 제품의 세계적 생산기지가 돼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

상 식적인 대답으로는 제조업 상품을 고급화.차별화하고 과학기술 개발에 국운을 거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밖에 또 하나의 살 길이 있다.

그것은 각종 서비스 분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서비스 산업이라 하면 누구나 관광 사업을 연상하지만 그밖에도 허다한 서비스 업종이 있고, 제조업에서조차 서비스 부분이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해 가는 추세에 있다.

특히 우리는 물류 서비스 분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을 동북아 물류센터로 만들어가면 우리의 살길이 트인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앞으로 13억 인구의 중국 경제가 계속 발전하면 엄청난 물량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인데 누가 그 운송과 물류 기능을 담당할 것인가.

다행히 한국은 동북아 물류 중심지가 될만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즉 한반도는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전세계 및 동북아 지역 내의 모든 공항.항만과 효율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동북아에는 아직 싱가포르.홍콩과 같은 물류센터가 없고, 중국에 다롄(大連).톈진(天津).칭다오(靑島) 등의 항구가 있기는 하나 우리의 부산.광양에 비하면 수심이 낮고 다른 조건도 우리보다 못하다. 특히 항만과 대규모 국제공항이 연계돼 있는 곳은 인천뿐이다.

이미 인천공항은 동북아 최대의 공항으로 자리잡았고 대한항공의 화물 적재량은 세계 제2위이며, 부산항의 컨테이너 적재량은 세계 2~3위를 다투고 있는데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한편 한반도의 철도와 시베리아 철도를 연결하는 사업이 논의되고 있는데 이것이 실현되면 그 또한 한반도를 물류 중심지로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물류라 하면 운송의 대명사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현대의 이른바 로지스틱 센터(logistic center)의 개념은 매우 포괄적이다.

해운.항공.육운의 중심지에는 그와 관련된 다양한 경제활동이 전개되고 거기에서 막대한 부가가치와 고용이 창출된다.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항구와 스키폴 공항, 독일의 함부르크, 벨기에의 앙투압, 동남아시아의 싱가포르.홍콩 등이 대표적인 물류센터인데 여기에는 운송회사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의 다국적 기업들이 상품의 생산.유통.재고.정보 등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지역본부를 두고 있다. 예컨대 네덜란드에는 6백50개 이상의 다국적 기업들이 모여 있다.

기업들이 물류센터로 모여드는 이유는 첫째로 비용이 절감돼 경쟁력이 높아지고, 둘째로 사업하는 데에 모든 것이 편리하고, 셋째로 기분좋게 살 수 있는 생활 환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한국이 동북아 물류 중심지로 될 수 있는가?

필 자가 관계하는 동북아경제포럼과 교통개발연구원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연구해 왔다.

한편 동북아의 경제발전과 한국의 물류센터 건설에 관심을 갖는 각계의 유지들은 동아시아 경제연구원 내에 동북아경제포럼 한국위원회를 설치하고 상기 연구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왔다.

그리고 한국위원회 몇몇 위원들은 올 6~7월에 상기 유럽 물류센터와 동남아 싱가포르.홍콩 등을 시찰하고 관계 기관을 방문해 설명을 듣고 많은 자료를 수집해 왔다.

위원회는 지난 8월 하와이에 다시 모여 현지 답사 결과를 분석, 외국 물류센터의 성공 조건을 도출하고 한국의 현실과 비교해 보았다.

우리가 얻은 잠정 결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외국 물류센터 성공 사례의 공통점은 다음의 12가지다.

①해운.항공.육운이 연계돼 있다.

②배후에 생산 또는 소비 기지가 있다.

③매우 효율적인 수송.유통.창고 등 물류 관련 시설과 서비스가 완비돼 있다.

④정부의 투명하고 일관된 정책으로 기업환경이 매우 좋다.

⑤민간단체가 앞장 서고, 정부가 지원하거나 아니면 정부 주도로 물류센터를 개발해 왔다.

⑥물류 기반시설 확충을 위해 과감한 선행 투자를 했다.

⑦정부가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가진 물류 전문회사를 육성하고 우수한 인적 자원을 전략적으로 양성해 왔다.

⑧복수의 외국어 사용 능력을 가진 양질의 전문 인력을 지속적.계획적으로 양성해 왔다.

⑨노사분쟁이 거의 없는 산업평화가 유지돼 왔다.

⑩정부정책이 시장 친화적이다.

⑪정치가 안정돼 있다.

⑫국가생존 전략에 대한 국민 이해가 두터웠다.

이에 비해 우리는 유리한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①물류 기반시설이 취약하고 물류 비용이 높다.

②행정규제 및 절차가 복잡하고 불투명하다.

③임금이 높고 노조가 강성이다.

④땅 값도 높고 사무실 임대료도 비싸다.

⑤입시교육에 도의교육이 짓눌려 있고 전문교육이 부실하다.

⑥외국인의 생활환경이 불량하다.

⑦외국인에 대해 비우호적이다(서울에는 차이나 타운이 없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식 집을 볼 수가 없다).

이러한 약점들은 이 나라의 국가경영 전반에 관계되는 문제이지만 그것들을 극복하면서 한반도를 동북아 물류 중심지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비단 우리의 선택이기에 앞서 세계경제와 동북아 경제정세의 변화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필연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21세기 한국 경제의 위상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우선 부산.광양.인천 등 주요 항구의 물류시설을 확충하고 싱가포르.홍콩에 버금가는 서비스 체제를 갖춰야 한다.

또 인천국제공항과 배후지역을 연결하는 국제물류단지 건설을 서둘러야 한다. 이 지역은 공항.항만.육운이 연계돼 있고 배후에 광대한 가용 토지가 있다.

또한 앞으로 중국 시장을 겨냥한 유럽.북미 기업들이 물류센터를 건립할 수 있는 최적지라고 생각된다.

부산.광양은 중량 화물, 영종도 지역은 경량 고부가가치 상품의 물류센터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영종도 지역은 자유무역 특구로 설정해야 한다.

부언하건대 인접 국가들도 제각기 물류센터 건립에 큰 관심을 갖고 있으므로 절대로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재원 염출이 문제인데, 해결책은 먼저 국가경영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장기 재정계획을 세워야 한다.

우리나라의 담세율(19.4%)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최저인데 이것으로 선진적 복지정책을 추구하면서 사회간접시설을 확충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둘째로 물류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한다.

인천공항 지역을 명실상부한 자유무역지대로 설정하면 민간자본 유치는 어렵지 않다.

끝으로 필자가 제창하는 동북아개발은행이 설립되면 자원 조달에 도움이 될 것이다.

위와 같은 한국위원회의 잠정 결론을 재확인하고 그를 보완하기 위해 13~15일 중앙일보 후원으로 무역센터 아셈 회의장에서 '동북아 물류센터 건설에 관한 국제회의' 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 회의에서는 국내외 저명한 전문가들이 한국이 동북아 물류중심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분석하고, 외국의 경험과 우리의 전략을 토의할 것이다.

이 회의를 통해 어떠한 정책적 결론을 얻게 되면 그것을 정부와 각 정당 및 관계 기관에 전달할 예정이다.

<남덕우 이사장 약력>

▶1952.11~1954.3 한국은행 근무

▶1957 미국오클라호마대 경제학 박사

▶1964.09~1969.10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1969.1~1969.12 경제과학심의위원회 위원

▶1969.10~1974.9 제24대 재무부 장관

▶1974.9~1978.12 제12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1979.1~1979.12 대통령 경제담당 특별보좌관

▶1980.9~1982.1 제14대 국무총리

▶1983.10~1991.2 한국무역협회 회장

▶1991~1994.2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

▶1996.5~ 現 동아시아경제연구원 이사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