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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한국 신화의 발견 만화 『신과 함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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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저승으로 향하는 열차 ‘바리데기호’는 어디서 출발할까. 답은 경기도 일산 대화역이다. 저승에 도착한 이들이 재판을 받는 동안 머무르는 곳은? 편리한 시설을 갖춘 ‘호텔 헬리포니아(Hotel Hellifornia)’다.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어떡하지? 걱정 마시길. 저승전용 커피전문점 ‘헬벅스(hellbucks)’가 있으니까. 만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미 눈치챘을 이 유머.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에 묘사된 현대화된 저승의 모습이다.

 지난 2009년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연재가 시작돼 ‘저승편-이승편-신화편’ 3부작으로 마무리된 『신과 함께』가 최근 단행본으로 완간됐다. 최근 몇 년 새 나온 한국 만화 중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다. 시작부터 독자들의 큰 호응을 받은 이 만화는 지난해 대한민국 콘텐트 어워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일본에서도 리메이크돼 만화잡지 ‘영간간’에 연재 중이다. 내년에는 김태용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진다.

만화 『신과 함께』의 주요 캐릭터들. [사진 애니북스]

 1부 저승편은 39세의 노총각 회사원 김자홍씨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저승차사(저승사자)를 따라 길을 나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저승에 간 그는 7명의 판관에게 재판을 받으며 기름이 펄펄 끓는 솥에 빠지는 화탕지옥, 얼음감옥에 갇히는 한빙지옥 등을 ‘염라국 최고의 국선 변호사’와 함께 헤쳐 나간다. 2부 이승편은 집터를 지키는 성주신, 부엌을 가꾸는 조왕신, 화장실을 관장하는 측신 등 잊혀졌던 한국 설화 속 신들을 주인공으로 재개발과 철거민 문제와 같은 사회적 이슈를 다룬다. 3부 신화편은 앞서 등장했던 신들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보여주는 일종의 프리퀄(prequel·전편보다 시간상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이다.

 자칫 고리타분할 수 있는 내용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것은 작가의 능력이다.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이 만화가 그동안 창작자들이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한국 전통 신화와 설화·민담이라는 새 이야기보따리의 문을 열었다는 점이다. 콘텐트 대국 일본에는 이미 전통 신과 요괴, 괴담 등이 대중문화의 주요 소재로 쓰이고 있다. 작가들을 위해 국립연구기관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가 일본 내 각종 설화와 요괴담 3만5700여 건을 모아놓은 ‘괴이(怪異)·요괴전승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관리까지 하고 있을 정도다.

 주호민 작가가 주목한 것은 경기도와 제주도 등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지만, 찾아보면 우리 조상들의 삶 속엔 신비로운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숨겨져 있을 터. 『신과 함께』는 이런 전통 소재가 새로운 문화 콘텐트로 주목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기분 좋은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