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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 '아무도 모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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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돌덩이보다 무거운 슬픔이 가슴을 짓누른다. 울라고 강요하지 않는데도 눈시울이 축축해진다. 온몸이 일시에 무너지는 느낌. 머리 속도 하얗게 비는 것 같다. 그저 먹먹할 뿐이다.

'아무도 모른다'(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사진)는 그런 영화다. 단절과 익명의 거대 도시 도쿄. 그 변두리 아파트에서 한 송이 들꽃을 피어내려고 했던 어린 아이들은 끝내 꽃향기를 맡지 못한다. 컵라면 용기를 화분 삼아 예쁜 꽃을 키우려 했던 아이들. 그러나 그 볼품없는 화분마저 베란다 밑으로 떨어진다. 화분과 함께 추락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잡아줄 사람은 진정 없는 것일까. 아무도 모른다.

네 남매가 있다. 화사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새 아파트로 이사한다. 그런데 웬걸? 두 아이는 트렁크 속에 숨어있다. 아이들도 이삿짐 신세? 트렁크에 들어가지 않는 큰딸은 거리에서 서성댄다. 한밤 열두 살 큰오빠는 여동생을 데리고 새집에 잠입한다. 일면 '007 영화' 같은 이 대목은 주인집을 속이기 위한 작전. 왜? 아이들이 많으면 집을 빌리기 어려우니까.

철부지 엄마는 한 술 더 뜬다. 장남을 제외한 나머지 세 아이에 외출 금지령을 내린다. 집안에서 떠들어도 안 된다. 엄마가 출근한 사이, 장남은 장을 보고 장녀는 빨래를 한다. 네 아이의 공통점은 모두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 물론 엄마의 명령이다. 정말 실수로 이웃과 마주치면 서로 친척 행세를 한다. 게다가 모두 아버지도 다르다.

그런 엄마마저 소식이 끊겼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집을 나간 엄마. 과연 네 아이는 어떻게 살아갈까. 장면 장면 가슴이 엔다. 그런데도 감독은 담담하다. 목청을 높이지 않고 아이들의 하루하루를 무덤덤하게 따라간다. 동화처럼 화사했던 집안이 너저분한 쓰레기장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란?

그럼에도 아이들은 울지 않는다. 소리 내어 엄마를 찾지도 않는다. 당연히 이웃들도 아이들에게 생긴 일을 모른다. 오직 관객만 눈치챌 뿐. 아이들의 선한 눈빛이 얼음보다 날카로운 비수로 돌변해 객석을 찌른다.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작. 칸영화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은 장남 역의 야기라 유야는 물론 나머지 세 아이의 천진한 얼굴이 잊힐 것 같지 않다. 부모 없는 네 아이의 생존기를 거대도시의 우울한 동화로 끌어올린 감독의 연출력이 놀랍다. 지금 서울에선 어떤 아이들이 울고 있을까. 영화는 1988년 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다뤘다. 4월 1일 개봉. 전체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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