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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이고 휘돌지만 점점 넓어지는 황허… 난, 그런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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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호 24면

철선을 엮고 그 위에 상판을 깐 부교. 임시로 부설한 다리라고 생각했는데 황허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다리보다 부교가 훨씬 많다고 한다. 설치비가 저렴하고 홍수나 갈수기엔 해체가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드디어 황허를 건넜다. 화산의 동봉에서 어렴풋하게 물길을 내려다본 이후 열흘 만이다. 그동안 황허는 보이지 않는 옆에서 나란히 동진했다. 이제 나는 북진할 때다.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에서 안양(安陽), 베이징까지 치고 올라가려면 기수를 왼쪽으로 틀어야 했다. 그러자 바로 황허를 만난 것이다.
또 하나의 진기록도 세웠다. 북송의 수도 카이펑에서 상(商)의 수도 안양으로 하루 만에 들어갔다. 조금 멋을 부린다면 서기 960년에서 기원전 1300년으로 2200여 년의 시간을 하루 만에 훌쩍 건너뛴 것이다. 물리적 거리만 해도 185㎞나 됐다. 4년 전 서울에서 해남까지 480㎞를 29시간 만에 달린 적이 있지만 그땐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200여 명이 함께한 ‘백의종군 기념 랠리’였다. 혼자 여행하면서 180㎞를 찍은 적은 미국 여행 때에도 없었다. 남풍의 덕을 봤다.

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 <30>황허를 건너다

중국에서는 법적으로 모두 화장을 해야 하지만 아직도 토장의 관습이 남아 있다. 화북평원 한가운데에 마치 이정표처럼 생긴 묘비가 다닥다닥 늘어서 있다.

진흙 함유량 많아 제방 터지면 도시 쑥대밭
그러고 보면 뤄양(洛陽)에서 정저우(鄭州), 정저우에서 카이펑으로 갈 때도 모두 하루 거리였다. 중국 8대 고도 중 안양을 포함한 4곳의 고도가 자전거 길로 하루 걸러 하나씩 있는 셈이다. 그만큼 몰려 있다는 건데 그 이유는 황허에 있다. 황허는 황토고원을 관통해 퉁관(潼關)에 이를 때까지만 물살이 세고 뤄양 근처의 멍진(孟津)부터는 잔잔해진다. 계단 3개로 이뤄진 중국 대륙의 마지막 계단으로 내려온 것이다. 발해로 들어갈 때까지 700여㎞ 내내 평평하다. 밀가루 반죽을 프라이팬에 부어서 부침개를 부치듯 황허는 황토고원의 황토를 세찬 물길로 계속 쏟아부어 기름진 화북평원을 빚어냈다. 그리고 물결이 잔잔해져 수운에도 편리하니까 화북평원과 황허를 낀 왕도들이 생겨난 것이다.

당(唐)대에 시안(옛 長安)에서 뤄양으로 천도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뤄양 서쪽으로 물살은 세고 육로는 험난한 한구관(函谷關)과 퉁관이 있어 곡물 운송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국사에 ‘식량 구하러 다니는 황제(逐糧天子·축량천자)’들이 등장하는 지리적 배경이다. 첫 통일왕조 진(秦)을 배출한 관중평원은 과밀해진 인구를 먹여살리기에는 협소해 기근이라도 닥치면 황제마저 손가락을 빨고 있어야 했다. 참지 못하고 문무백관을 데리고 뤄양까지 370㎞를 행차한 축량천자들은 의외로 중국 역사에 이름 있는 황제다. 수(隋) 문제와 당 고종, 당 현종…. 중국에서 경제 중심의 이동을 몸소 보여줬다.

이때 이미 기름진 곡창지대는 화북평원을 거쳐 화이허(淮河)와 양쯔강 하류 지역으로 이동했다. 수 양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쯔강·화이허·황허의 세 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구상했고, 그 핵심은 화이허와 황허를 연결하는 운하였다. 그 운하가 황허와 교차하는 지점에 카이펑이 있다. 그렇다면 굳이 뤄양으로 도읍할 필요가 있을까? 송을 건국한 조광윤(趙匡胤)이 카이펑을 낙점한 이유다. 왕도의 변천은 밥 먹는 것과 관련이 있다.

길을 잃고 헤맬 때 전기자전거를 탄 아가씨가 홀연히 나타나 안양(安陽)까지 길을 인도했다.

구글 지도는 만약 자동차로 안양에 가려면 다시 정저우로 돌아가서 107번 국도를 타라고 안내한다. 되돌아가는 것처럼 끔찍한 일은 없다. 나는 자전거의 기동성을 살려 219번 성도로 질러가기로 했다. 지방도로여서 황허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없다. 혹시 모르고 지나치지나 않을까? 웬만한 크기의 하천만 봐도 사람들에게 ‘이게 황허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어이없어 하며 북쪽을 가리키곤 했다. 드넓은 밀밭을 지나가자 습지가 나오는가 했더니 황허인지 물어볼 필요 없이 강가에 당도해 버렸다. 넓고 탁한 물이 시야에 가득하다. 흐른다기보다는 대지가 물에 잠긴 것 같다.

화 안 내는 사람이 한번 화나면 무섭듯이 물살이 빠른 협곡보다 잔잔히 흐르는 이런 강이 그렇다. 밀가루 반죽을 너무 많이 부으면 프라이팬이 넘친다. 황허의 강물은 1㎥당 35㎏의 진흙을 함유하고 있어 물이 아니라 묽은 황토반죽이다. 그 반죽을 계속 하류에 쏟아부으니 강바닥이 점점 높아져 급기야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중력마저 벗어난 듯한 지상하(地上河)가 됐다. 강바닥이 주변보다 높아서 그대로 놔두면 물줄기가 어디로 튈지 몰라 ‘황하대제’라고 불리는 1200㎞의 강둑을 쌓았다. 마음대로 흐르지 못하게 된 황허가 울분을 터뜨리면 강둑이 무너지고 해발고도 50m가 안 되는 화북평원의 도시들은 수몰이 아니라 황토반죽에 매몰된다. 카이펑만 해도 지하 20m 밑으로 세 층의 도시가 차례로 묻혀 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쌓이는데 인간이 건드려서 황허가 폭발한 적도 있다. 1938년 중일전쟁 때의 얘기다. 국민당 정부는 일본군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살수대첩 이후 들어보지 못한 수공을 써서 정저우 근방 화위안커우(花園口)에 있는 둑을 다이너마이트로 터뜨렸다. 마른 하늘에 갑자기 밀려드는 검은 물기둥에 주민들은 속수무책이었다. 89만 명이 목숨을 잃고, 800만 명이 집을 잃었다. 더욱 억울한 건 일본군의 정저우 점령도 막지 못했다는 점. 중국에서 자연을 잘못 건드렸다가 치르는 대가의 단위가 다르다. 지금도 황허 하류의 강바닥은 매년 10㎜씩 높아지고 있다.

이렇게 무섭도록 넓은 황허가 한동안 단류됐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황허는 청장(靑藏)고원 동북부 ‘별이 잠드는 바다(星宿海)’에서 발원해 발해까지 5464㎞를 흐르는데 20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매년 중간에 말라버렸다. 끝내 바다를 찾지 못하고 도중에 길을 잃은 날들은 늘어만 갔다. 97년에는 226일 동안 바다로 가지 못했고 심지어 발해에서 700여㎞ 떨어진 카이펑 인근까지 단류 지점이 거슬러 올라오기도 했다. 물고기들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상상해 보라. 알을 낳기 위해 강으로 올라오는 회귀성 어류가 바다에서 느낄 공허함을 제쳐놓더라도 자고 일어나면 언제 물 밖으로 내동댕이쳐질지 모르는 물고기들의 필사적 유영을…. “황허는 동해(황해를 지칭)에서 수명을 다하고 만리는 가슴에 새겨진다(黃河落盡走東海, 萬里寫入襟懷間)”는 이백(李白)의 ‘증배십사(贈裴十四)’를 떠올린다.

철선 연결해 상판 얹은 부교로 통행
황허가 바다에 들어갈 때까지 온갖 고난을 겪어야 하는 만리역정을 기리는 이 시는 이제는 바다를 그리워하면서도 갈 수 없는 슬픔을 노래해야 마땅하다. 아니면 시적 상상력으로만 황허는 바다로 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허난성 곳곳에 하천들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서 황허의 안부가 정말 궁금했다. 지류들이 말라버리니 황허인들 버텨내겠는가.

화하문명의 상징인 황허가 마르자 정부에 비상이 걸렸다. 자연의 이변은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으로 번지기 쉽다.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기 때문에 자연의 이변은 하늘이 아들을 버렸다는 뜻으로 읽혔다. 선출된 권력이 아닌 중국 공산당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황허수리위원회는 황허의 지류에 작은 유수지들을 파서 물을 담아뒀다가 강이 마르기 시작한다는 징후가 포착되면 수문을 열었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단류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치수의 현장을 보고 있다. 하지만 황허의 수량은 60년대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여서 물 부족의 근본 원인을 해결한 건 아니다.

도도한 황허엔 고기잡이 배들도 눈에 띄지 않고 사람들도 적어서 적막함이 흘렀다. 건널 다리라고는 작은 철선들을 묶고 그 위로 철판을 얹은 부교밖에 없었다. 흙을 실은 화물차들이 누런 먼지기둥을 뿜으며 왕래하는 틈바구니에서 우둘투둘한 상판을 달리다 중간에 멈춰 섰다. 이렇게 건너버릴 강이 아니다. 철선 사이로는 물살이 제법 세차다. 모처럼 한곳에서 오래 머물렀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아득함이다. 주위에 거치적거릴 게 아무 것도 없는 평원에서 황허는 더 광활하다. 인지할 수 없는 넓이와 깊이의 사물을 대하면 자신이 얼마나 미소한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백처럼 황허의 역정을 떠올리면 그동안의 성취와 좌절 모두 부질없어 보인다. 어떤 일이든 결국 흘러간다. 그런데 황허는 수없이 꺾어지고 부서지고 휘돌지만 점점 더 넓어져서 바다로 흘러간다. 나는 그런가? 나이가 들수록 넓어지고 있는가? 실패와 좌절조차도 발 딛고 더 멀리 볼 수 있는 삶의 지반으로 꾹꾹 다지고 있는가? 황허가 묵시하는 인생의 길이다.

‘수심이 깊으니 물속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경고문들이 난간에 붙어 있다. 괜히 물에 뛰어들고 싶어진다. ‘수심이 얕으니 물속으로 내려가도 별 게 없다’고 써 있었으면 유혹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나는 이런 인간인가 보다. 그러니까 여기서 강을 건너고 있지’. 이어서 자전거 통행금지 표지판이 보인다. 원래 자전거를 타면 안 되는 부교였던 것. ‘어쩌라고?’ 속으로 한마디 하고 마저 건넜더니 요금 받는 부스에서 아저씨들이 창문을 열고 쳐다본다. 돈 달라거나 왜 건넜느냐고 타박하는 눈치가 아니다. 그냥 날 구경하는 거라는 느낌이 들자 손을 흔들어주면서 표표히 강을 떠났다.



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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