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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금융위기 막은 왕치산 … 그때마다 여론 잡은 류윈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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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왕치산(左), 류윈산(右)

경제 전문가 왕치산(王岐山·64) 상무위원은 당초 상무부총리가 예상됐다. 하지만 18차 당 대회 직전 급작스럽게 사정·감사를 담당하는 당 기율검사위 서기를 맡는 걸로 선회했다.

 이유는 15일 시진핑(習近平) 신임 총서기의 발표문에서 드러났다. 시 총서기는 중화부흥·민생안정과 함께 반(反)부패를 핵심 과제로 강조했다. 최근 국내외 매체에서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당 간부들의 부패 스캔들을 진화할 ‘소방수’로 왕치산이 배치된 것이다.

 ‘소방대장’이란 별명답게 왕치산은 위기 상황마다 해결사로 투입돼 왔고 항상 유능하게 문제를 풀어내며 거물로 성장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로 광둥성의 대형 금융기관들이 연쇄도산 위기에 빠지자 후견인 격인 주룽지(朱鎔基) 당시 부총리는 건설은행장이던 왕치산을 광둥성 부성장으로 급파했다. 그는 해외 채권자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0억 달러 이상의 부실채권을 떠안고 있던 광둥국제신탁투자공사(GITIC)를 파산시켜 단숨에 부실 문제를 해결했다.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베이징에 창궐해 하룻밤에 수만 명이 도시를 탈출하고 당국은 은폐에 급급한 대혼란이 벌어졌다. 하이난성 서기로 부임한 지 5개월밖에 안 됐던 왕이 베이징 시장으로 투입됐다. 그가 시민들에게 정보를 사실대로 공개하고 세계보건기구(WHO) 등 외부 지원을 적극 수용한 지 한 달 만에 사스는 소멸했다. 2008년엔 금융·대외무역 담당 부총리로 임명돼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을 총지휘했다.

 왕치산은 야오이린(姚依林) 전 부총리의 사위로 태자당이다. 18기 정치국 상무위원회 에선 독립적 성향으로 분류된다. 칭화(淸華)대 교수를 겸직하는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중앙서기처 제1서기에 내정된 류윈산(劉雲山·65) 상무위원(당 중앙선전부장)은 모호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다. 산시성 출신이지만 68년 네이멍구자치구로 하방된 뒤 30년간 그곳에서 활동했다. 신화통신 기자를 거쳐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네이멍구자치구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중앙공청단 주석이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친분을 다졌다. 이 때문에 그를 공청단파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가 중앙무대로 진출한 건 1993년 중앙선전부 부부장으로 임명되면서인데, 후진타오가 발탁했다는 설과 류윈산의 부모가 혁명 원로인 보이보(簿一波·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의 부친)와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보이보는 후진타오의 라이벌인 장쩌민(江澤民) 당시 국가주석과 친밀한 사이였다. 류윈산은 장쩌민의 각별한 신임으로 10년간 중앙선전부 부부장을 지냈고 2002년 부장으로 승진했다. 시사평론가인 류루이사오는 “류윈산의 상무위원 승진도 장쩌민에 대한 충성 맹세 덕분이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에 전했다.

 왕치산이 소방수라면 류윈산은 ‘나팔수’다. 그가 20년간 담당한 중앙선전부는 중국 내 신문·방송·서적·영화·인터넷 등 모든 미디어를 통제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 기간 동안 관영 언론의 해외 진출을 지원해 중국의 소프트 파워 양성에 힘썼다는 평가와, 혹독한 언론 통제와 인터넷 검열의 주범이란 비판을 함께 받아 왔다. 상무위원이 돼서도 미디어 통제는 그의 몫이 될 전망이다. BBC는 그가 언론·인터넷 감시에 강경론자로 알려져 있으며 수천 명의 인터넷 통제요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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