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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 女論

조선 농촌 지켜준 부호 왕재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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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1934년 6월 17일 한 70대의 노부인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각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되었다. 며칠 동안 신문들은 그녀의 일대기를 소개하고 추도의 글을 실었으며, 그녀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2만여 군중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치러졌다. 일제 식민지기에 일흔일곱의 나이로 사망한 조선여성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화제가 됐을까?

 그녀는 ‘조선의 할머니 왕재덕(王在德) 여사’라 불렸다. 왕재덕은 황해도 신천에 태어났고, 18세에 결혼해 2남1녀를 두었으나 29세에 남편 이영식이 사망했다. 그 후 왕재덕은 타고난 근면함과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남편이 남긴 땅을 일구고 재산을 모아 수십만원의 자산을 가진 부호가 되었다. 그녀는 토지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친일파와 조선총독부의 일본인들 앞에서도 자신의 땅에 대한 권리를 당당히 주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독립 운동, 육영사업, 종교단체 기부, 빈민 구제 등에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 일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특히 그녀가 역점을 둔 사회사업은 농촌개발이었다. 중국에 있는 딸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의 문물을 시찰한 뒤 농민 교육 사업에 대한 영감을 얻어 1930년 신천농민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녀는 “조선은 농산국이다. 그러므로 만사를 농촌을 본위로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으며, 농촌중심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농촌지도인물을 배양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녀의 가족들 역시 애족애민정신이 남달랐다. 그녀의 아들 이승조는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금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른 뒤 병사했고, 그녀의 딸은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과 결혼을 했다. 그녀의 자손들도 신천농민학교에 거액을 희사하고 학교의 승격운동에 힘쓰는 등 그녀의 뜻을 이어갔다. 매년 그녀의 추도기념식이 열렸고, 1986년에는 이 학교 동문들이 그녀의 송덕비를 경기도 파주에 세우기도 했다.

 어제 11월 11일은 흔히 ‘빼빼로 데이’라 불리지만, 사실 한자의 ‘십일(十一)’이 획을 합치면 ‘흙 토(土)’가 되기 때문에 정해진 ‘농업인의 날’이다. 농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반인 흙, 토지를 떠올리며 11월 11일로 기념일을 정했다니 ‘빼빼로 데이’보다는 훨씬 심오한 의미의 ‘파자(破字)놀이’가 숨어 있지 않은가? 특히나 오늘날처럼 식량주권이 위협받고 있는 시기엔 일제의 토지와 식량수탈 앞에서도 당당히 조선의 농촌과 농민을 지켰던 왕재덕 여사 같은 분들의 뜻을 되새겨보는 것도 좋았겠다 싶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