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동아시아 상상력은 환상문학의 보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94년 1월 '국내편' 제 1권이 처음 출간된 무협팬터지소설 『퇴마록』(들녘.각 권 6천5백원) 이 이달 초 나온 '말세편' 제 6권으로 드디어 완결됐다.

지금까지 해설집 한 권을 포함한 전 20권의 총 판매량은 7백80만여부. '말세편' 5, 6권만 한달새 벌써 28만여부 나갔다.

가히 기록 행진이다. 93년 여름 PC통신 하이텔 게시판에 연재된 뒤 폭발적인 네티즌들의 호응에 힘입어 종이책으로 나오게 된 것도 사이버문학과 아날로그 출판의 교류 가능성을 보여준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영화.머드게임 등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퇴마록』의 이같은 대중적 흡인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산해경역주(山海經譯註) 』『도교와 문학 그리고 상상력』 등의 저서를 통해 동아시아 신화 연구에 천착해온 정재서(49) 교수는 "이 책에서 엿보이는 동아시아 문학의 전통적 '이야기성' 과 '환상성' 이 신세대의 정서에도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 이라고 분석한다.

본격 문단에선 거의 '무시' 돼온 이 책에서 과연 동아시아적 상상력을 살린 '족보있는' 환상문학작품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한국팬터지론' 을 주장해온 저자 이우혁(36) 씨와 정교수의 진지한 토론을 들어보자.

▶사회〓마지막 19권이 나오기까지 7년 반이 넘게 걸렸다. 주 독자층 연령이 10대에서 20대 초반인 걸 생각하면 그렇게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를 유지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우혁〓나는 책을 사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읽히는 걸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을 쓸 때 무엇보다 '재미' 에 중점을 두는 건 그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퇴마록』의 경우 매 권 초판이 나오자마자 사보는 고정독자만 10만명쯤 됐다.

▶정재서〓이 작품이 그렇게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건 흥미로운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풍부한 서사성, 즉 이야기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 문학은 관념적 경직성, 엄숙주의 등에 얽매여 그런 재미를 소홀히 해왔다. 이제 문단 주변부에서 맴돌고 있는 대중소설이나 팬터지소설들의 이야기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런 요소를 적극 수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회〓요즘 팬터지소설도 하나의 문학장르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하지만 『퇴마록』은 팬터지라기보다 무협소설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정재서〓그것은 팬터지문학에 대한 서구주의적 편협된 시각에서 나오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톨킨의 『반지전쟁』과 같은 서양팬터지도 있지만 『서유기(西遊記) 』같이 훌륭한 동양팬터지도 있다. 그리고 이참에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무협소설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다. 중국에선 무협소설이 정통문학에서 갈라져 나온 하나의 장르로 당당히 대접받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녹정기(鹿鼎記) 』 등을 쓴 '천재' 작가 김용을 3류로 폄하하는 이들도 많다. 이것 역시 서구 문학을 기준으로 보는 사고다.

▶이우혁〓컴퓨터게임 등을 통해 서양팬터지에 먼저 익숙해진 10대 독자들도 그런 편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무협팬터지는 '정통' 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유럽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스토리 구조에 등장인물이나 장소 이름만 한국식으로 바꾼 작품은 정통이라 할 수 있는가.

▶사회〓일리 있다. 그 문제를 따져보기 위해선 팬터지문학, 특히 동양환상문학의 역사적 맥락부터 다시 짚어보는 게 좋겠다.

▶정재서〓서양이나 동양 모두 문학의 역사는 '환상성' 이 오랜기간 지배해왔다. 리얼리즘이 대세를 이뤘던 건 근세 이후 잠깐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동아시아 문학은 '현실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이 항상 존재한다' 는 세계관을 토대로 현실과 환상성의 요소를 뒤섞어 보여왔다. 그런 전통은 동아시아 환상문학의 효시격인 『산해경』에서 시작, 중국 육조시대 『지괴(志怪) 』에서 소설의 틀을 갖춘 뒤 명나라 때 『서유기』에서 정점을 이뤘다. 그리고 청나라 때 작품인 『요재지이(聊齊志異) 』,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에까지 이어진다.

▶이우혁〓우리나라의 『홍길동전』『전우치전』 등도 그런 동아시아적 환상성이 담긴 작품 아닌가. 나는 바로 우리 고유의 '도(道) ' 와 '팔자(八字) ' , 그리고 '윤회(輪廻) ' 등의 개념에서 환상성의 소재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의미있고, 또 우리 정서에 더 맞는 작업이라고 본다. 『퇴마록』은 그 첫 걸음이었다. 『왜란 종결자』를 내면서부턴 아예 내 책을 '한국형 팬터지' 또는 '한국팬터지' 라는 용어로 구분하기도 했다. 앞으로 치우천왕 등에 대한 역사팬터지를 쓰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좋은 아이디어다. 우리 청소년들만 해도 그리스.로마 신화의 등장인물은 인용할 수 있어도 고대 동북아시아의 신화적 인물인 치우천왕은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정재서〓서양식 팬터지만 편식할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스스로 소외해온 동아시아적 상상력을 발휘한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이 나와야 한다. 나는 80년대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실명소설 『단(丹) 』이 우리 고유의 무협.환상성을 대중적으로 인식하게 해준 계기였다고 생각하는데,『퇴마록』은 그 줄기를 이은 작품이라고 본다. 거기에 가톨릭 신부라든가 좀비를 이용하는 부두교, 이집트 신비주의 등 세계 각국의 신화.전설적 요소까지 차용한 것은 이 책의 장점이다.

▶사회〓문학적인 완성도를 점차 높여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정재서〓이 책의 경우 PC통신을 통해 연재됐던 초반부는 네티즌과의 '쌍방향성' 을 인식해 재미에 너무 치우쳤기 때문인지 구성력이 많이 떨어졌다. 또 '말세편' 에선 좀 극복이 됐지만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도 강한 편이다. 반면 문체가 소박할 정도로 간결한 것은 오히려 효과적이었다. 『요재지이』 등도 그런 소박한 문체로 쓰여 있다.

▶이우혁〓적어도 팬터지 세계를 구축하는데 있어 '자체 모순' 은 없는 작품을 쓰려고 한다. 톨킨이 위대한 것은 그의 팬터지 세계는 그 나름의 완벽한 논리 속에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재서〓그렇다. 무엇보다 환상문학이 생명력을 얻기 위해선 '내적 리얼리티' 를 갖춰야 한다. 팬터지란 꽉 막힌 현실세계의 탈출.극복 수단이자, 현실세계를 다른 각도와 깊이로 볼 수 있는 방식이지 결코 황당무계한 이야기 자체만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작업을 기대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