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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짧은 것은 소중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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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정진홍
논설위원

# 절정이던 가을단풍이 어느새 낙엽으로 변해 간다. 그 절정과 낙하 사이의 시간적 여백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시간이 길지 않고 짧았기에 더욱 절절하고 소중하게까지 여겨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든 절정은 짧다. 아니 어쩌면 순간이다. 간혹 오래된 책들을 다시 뒤척이다가 어린 시절 곱게 물든 단풍의 낙엽을 골라 책갈피에 끼워 놓은 것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단풍 든 낙엽의 윤곽이 책 속에 그리기라도 한 듯 스며 있을 때 또다시 느끼게 된다. 짧게 산 단풍의 그 여운이 얼마나 길고 깊으며 진한 것인지를! 이처럼 이미 낙하한 가을 낙엽 하나에도 길고 충만한 생명의 기억들이 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절정의 짧음을 탓하지 마라.

 # 짧은 말이 긴 여운을 남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구구절절 긴 이야기는 때로 흘려들어도 간명한 일침 같은 짧은 말은 새겨듣는다. 그래서 오히려 짧은 화두가 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지 않던가. 19년 전 열반하신 성철 스님의 생활 속 화두는 “이 뭐꼬”라는 한마디로 압축된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 퇴설당에서 열반에 드실 때 남긴 마지막 말 한마디 역시 “잘 하그래이”뿐이었다. 그 즈음에 성철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뵙겠다며 사람들이 해인사로 몰려들어 산사로 향하는 길이 길고 길게 장사진(長蛇陣)을 이뤘지만 정작 스님의 가르침은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의 깨달음처럼 짧고 간명했다. 그래서 더욱 오래도록 기억되고 소중한 것으로 남아있는지 모른다.

 # 실천적인 경제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이기도 했던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썼다. 그런데 “작은 것이 아름답다”면 “짧은 것은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엊그제 올해로 10년째 된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의 개막을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20여 분 전후의 짧은 시간 동안 상영되는 단편영화는 다소 난데없는 전개와 생뚱맞은 결말에 당혹스럽기까지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진실의 단면이 묘하게 스며 있다. 그래서 짧지만 소중하다.

 # 이 영화제의 개막작은 ‘주리(Jury·심사위원단)’였다. 20여 분 남짓한 영화의 줄거리라고 해봐야 단편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어떤 영화에 대상을 주니 안 주니 하며 충돌하고 다투는 내용이다. 그런데 정작 이 좌충우돌하는 영화를 감독한 이는 다름아닌 김동호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장이었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맨땅에서 일궈낸 한국, 아니 세계영화계의 전설이다. 하지만 올해 만 나이 일흔다섯을 넘긴 그가 20여 분짜리 짧은 영화를 만들어 신참내기 감독으로 ‘입봉’한 것이었다. 세상적 나이로 결코 짧지 않게 살아온 그는 “이왕 이 바닥에 발을 디뎠으니 앞으로도 길게 더 많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모두가 웃으며 그의 말을 들었지만 나는 왠지 그의 말이 빈말 같지 않았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이 설사 짧게 끝날지라도 적잖게 긴 여운을 남길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 정말이지 짧은 영화를 보고 긴 수다를 떤 느낌이랄까? 단편영화제 개막식 뒤풀이가 그랬다. 둘이 합쳐 영화경력 100년이라는 안성기, 강수연 두 국민배우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스크린 안과 밖에서 모두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영화로 꿈을 꾸고 꿈이 영화를 만든다”던 일본 감독 도미야마의 담백한 건배사 ‘간빠이’는 너무 짧고 간명해서 되레 매력적이었다. 『장자(莊子)』에서 이르길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길게 늘여주어도 괴로움이 따르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 주어도 아픔이 따른다(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고 했다. 단풍의 절정은 짧고 낙엽의 낙하는 길다. 고승의 화두는 짧으나 가르침은 가없다. 우리 인생도 짧지만 소중한 순간들이 있다. 거기 진짜 인생의 참맛이 숨어 있다. 그 짧지만 소중한 순간순간들을 이 늦가을에 놓치지 말자. 어차피 인생 역시 짧고 긴 여운의 영화니깐.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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