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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여곡 남기고 떠난 '내 마음의 국민가수'

중앙일보

입력

새벽까지 퍼붓던 장맛비의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간간이 내리는 빗방울이 검정 우산에 후두두 떨어졌다.

31일 아침 서울 강남성모병원. 전날 79세로 별세한 원로 가수 황금심씨를 문상하기 위해 동료 신카나리아(85) 씨가 병원을 찾았다.

경기도 안산의 예술인아파트에서 딸과 함께 사는 신씨는 친동생처럼, 친구처럼 젊은날을 함께 보낸 황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른 아침 부랴부랴 길을 나섰다.

여든을 넘긴 그의 얼굴에는 검은 반점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병원 입구에서 장례식장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홀로 병원을 찾은 신씨는 몹시 슬픈 표정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어찌 그리 고왔던지. 젊어서 예쁘지 않은 여자가 있을까마는, 그이는 너무 고왔어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서면 아휴, 같은 여자들도 탄성을 질렀지요. "

신씨는 황씨보다 여섯살 위지만, 열두살의 나이에 일찌감치 데뷔한 황씨와 동료로 지냈다고 했다.

"얼굴이 예쁘면서도 참 착하고 얌전했어요. 누구에게든 싹싹하고 조용하고…. "

한국 최초의 '스타 커플' 이라고 할만한 황씨와 열두살 연상의 인기 가수였던 남편 고복수(1972년 타계) 씨의 결혼 당시를 이야기할 때는 신씨의 얼굴도 잠깐 활짝 펴졌다.

"그럼요, 대단했지요. 부러워하는 이들도 많았구요. 같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보는 사람까지 행복했어요. "

황씨는 노래 솜씨에 반한 동네 음반 가게 점원의 소개로 34년 열두살의 나이에 음반사를 찾아가 '외로운 가로등' 을 내 데뷔했다.

이후 그녀는 '알뜰한 당신' '울산 아가씨' '뽕따러 가세' 등 4천여곡의 노래를 불러 큰 인기를 누렸다.

"그땐 분단되기 전이었으니까, 이북을 포함해 전국 13도를 다 돌며 공연했어요. 만주.하얼빈.상하이 등 외국에도 많이 갔지요. 여름에 공연을 떠나면 겨울옷을 소포로 부쳐달래서 입고 공연했을 만큼 장기 공연이었어요. 더위나 추위를 가리지 않고 노래를 계속했지요. "

장례식장 입구 2층에 마련된 빈소. 신씨가 들어서자 빈소를 지키던 유가족들이 "아이고, 어머니 오셨어요" 라며 반갑게, 혹은 서럽게 신씨를 맞았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보낸 조화 등에 둘러싸인 영정 속의 황씨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독실한 천주교도로 세례명이 마리아인 황씨를 위해 신도들이 성가(聖歌) 를 나지막이 부르고 있었다.

신씨는 영정 앞에 서서 한참을 흐느꼈다. 먼저 떠난 데 대한 원망, 말년에 자주 보지 못한 아쉬움, 때론 즐겁고 때론 고통스러웠던 인생에 대한 회한. 역시 가수인 황씨의 아들 영준(46) 씨가 함께 흐느끼며 떨리는 신씨의 몸을 부축했다.

가수는 가도 노래는 남는다. 병상에서도 "나으면 다시 가수 하고 싶다" 던 황씨는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하고 갔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는 팬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장례는 가수협회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1일 오전 8시30분. 장지는 경기도 용인 가톨릭공원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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