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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경제개혁 조급증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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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사이 경제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인수위 위원들의 말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영삼 정부 때도 출범 직후 느닷없이 1백일 작전을 시행한다 하여 시간 낭비만 했고, DJ 정부 들어서도 정부 주도로 빅딜 한다면서 성과없이 하이닉스란 괴물을 만들어낸 일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DJ 정부 초기와는 달리 지금은 세계 4위 외화보유액에, 수출 호조가 지속되고 있으며, 저물가와 저금리 속에 4%대의 잠재성장이 가능하므로, 다소 경제가 위축되더라도 나름대로 멋진 그림을 그려볼 만한 상황이다.

따라서 '분배, 재벌개혁, 노동참여'를 지향하는 진보적인 위원들의 입장에서는 가슴이 두근거릴 만한 상황이고, 이들이 정부의 힘으로 재벌을 개혁하고, 성장보다 분배에 우선순위를 두고, 노동의 경영참여를 늘려 노사화합을 다진다 해도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 '7% 성장' 장담한 인수위

그런데도 인수위는 7% 경제 성장을 향후 10년 간 유지시키겠다 하여 경제인들을 혼동시키고 있다. 7%는 우리의 잠재적 경제성장률을 크게 상회하는 수준일 뿐 아니라 분배정책이나 노동자 친화적 정책을 포기하고 성장의 주역인 기업들에 상당한 혜택을 주어야만 얻을 수 있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수위는 성장을 다소 손해보더라도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할 것인지, 아니면 7% 지속이라는 성장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할 것인지 솔직한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이다.

둘째로 새 정부는 과거에 대한 감정적인 대응이나 단기적인 경기부양정책 수립을 자제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적어도 노령화사회가 되는 20년 후를 대비한 경제정책을 그려주길 바란다.

감정적인 대응이 두드러진 부분은 재벌 정책이다. 재벌은 과거의 산물이고 이젠 시장 개방과 기업투명성 제고 조치로 상당부분 개선이 가능해졌다.

일례로 소송 남발을 방지한다는 전제 아래 증권집단소송제도가 도입되고, 유연한 지주회사제도나 사외이사제도가 활성화된다면 현재의 재벌체제는 권한과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투명한 기업집단구조로 전환될 수 있다.

*** 잇따라 나온 초법적 구상

미래의 정책과제로 인수위는 동북아 물류센터나 행정수도 이전 등 재정지출을 바탕으로 한 성장정책을 쏟아내고 있는데, 이보다는 건전재정 확립, 부실 연기금의 건전화, 은행 및 공기업민영화, 정부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올릴 수 있는 정부개혁안 등 장기간 지속될 수 있는 정책수립에 우선순위를 두었으면 한다.

또한 20년 후 노령화 복지사회에 우리 국민이 선진국 수준의 삶을 누리기 위해 어떤 국가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며, 기간별 경제 성과는 어떠해야 하는지 이를 구체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정부부패지수, 기업의 투명성지수, 환경지수, 교육의 질, 교통사고 사망률 등에 대한 연도별 개선 목표를 할당하고, 목표달성을 지원하는 시스템과 프로세스 구축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정부가 법을 올바로 집행함으로써 스스로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으면 한다.

DJ 정부의 경제 정책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제도가 없었다기보다 법집행을 일관되고 공정하게 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정직하고 근면한 전문가가 기관장으로 임명되고 이들이 정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이번 기업정책 수립과정에서 구조조정본부 해체를 정부가 강요한다든지, 현재 기업집단들이 소유한 금융기관의 소유권을 제한한다든지,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 과세를 위해 헌법을 바꾸더라도 추진하겠다든지 하는 초법적인 발언들은 현실적으로 무익한 것이고 인수위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들이다.

지금은 조급함보다 장기간 안정적으로 작동가능한 제도 구축을 위해 인내가 필요한 때다.

선우석호(홍익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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