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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엔 타임머신 여행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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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조화유
재미 칼럼니스트·소설가

이번 가을에 나는 특별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이번 여행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나를 태우고 갈 교통수단은 타임머신(time machine). 나의 타임머신은 누렇게 색이 바랜 옛 일기장들이다.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회학과 1학년 때인 1961년 11월 5일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고려대 다니는 친구 OO가 찾아와 영어로 연애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자기 학교 법대 1학년 여학생한테 보낼 거라고 했다….”

 내가 써준 영어 편지가 시원찮았는지 그 친구는 그 여학생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나중에 그녀는 ‘김상희’라는 예명을 가진 유명가수가 되었고, 내 친구는 미국 유학을 다녀와 저명한 정치학 교수가 되었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이 몹시 아프다고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잘 팔릴 정도로 아프단다. 왜 아플까? 그 책을 읽어보지 못해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경제적인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등록금이 너무 비싸 대학 다니기 힘들고, 비싼 돈 들여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잘 안 되니 연애도 결혼도 잘 안 된다. 그래서 아프다. 뭐 이런 것 아닐까? 그러나 나와 우리 세대가 1960년대에 겪은 아픔에 비하면 별것 아닐지 모른다. 지금은 대여장학금 등 각종 장학금이 많아 공부 잘하는 학생이 돈이 없어 대학엘 못 가는 세상은 아니니까 말이다.

 1961년 4월 4일 나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가 사회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고 학교 신문에 났다. 그러나 그 정도 가지고는 어디서 장학금 한 푼 받을 수 없다. 등록금 낼 일이 걱정이다….”

 6·25전쟁이 끝난 지 8년밖에 안 된 그 당시는 대한민국 국민 99%가 가난했다. 서울에서 살다가 부산으로 피란 간 우리 집은 더 가난했다. 서울대 입시에서 전체수석이나 최소한 단과대학 수석을 해서 어디서든 장학금을 받아야 대학을 갈 수 있는 상황이라 난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철학과에 지망한 학생이 나와는 불과 몇 점 차로 전체수석과 단과대학 수석을 독차지하는 바람에 나는 고작 과(科) 수석에 그쳤다. 물론 장학금 한 푼 받지 못했다.

 등록금은 집에서 간신히 마련해 주었으나 생활비는 내가 벌어야 했다. 가정교사 자리를 얻기 전에는 정말 힘들었다. 교복을 사 입지도 못했다. 점심을 굶을 때도 있었고, 차비가 없어 걸어서 다닐 때도 많았다. 다른 대학 다니는 친구들의 영어나 독일어 번역을 해주거나 리포트 쓰는 것을 도와주고 용돈을 얻어 쓰기도 했고, 고등학교 때 전국학력경시대회 같은 데 나가 상품으로 받은 손목시계와 파아커 만년필을 전당포에 맡기고 푼돈을 빌리기도 했다.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거뜬히 견뎌냈다. 그때 내 일기장에는 독일어로 Auf Regen folgt Sonnenschein!(비 온 뒤엔 볕이 난다)이라고 여기저기 적혀 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랄까, 고생한 덕분에 나는 ‘포슬유감’이란 글을 쓸 수 있었고, 이것이 그해 서울대학신문사 현상문예공모에서 수필부문 당선작이 되었다. 한동안 친구의 자취방에서 빌붙어 자면서 밤마다 이한테 물린 경험을 토대로 유머러스하게 쓴 철학적 에세이라 서울대 안에서는 한동안 화제가 됐었다. 그런데 당시 나는 얼마나 궁했던지 현상금 3만환(서울대 한 학기 등록금이 5만환 할 때)의 일부를 미리 좀 달라고 대학신문사에 부탁해서 받아썼다. 현상금 가불이라니, 얼마나 웃기는가.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 서재에는 나의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장 30여 권이 꽂혀 있다. 이따금 밤에 일기장 하나를 꺼내 읽는다. 이런 일도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까지 그대로 적혀 있어서 그 시절을 다시 사는 느낌이다. 기쁜 일, 슬픈 일, 부끄러운 일, 후회되는 일 등등 무진장이다. 되돌아보면 아픈 기억까지도 다 아름다운 추억이다.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 추억여행을 떠날 수 있다. 일기장이란 타임머신 덕분이다. 모든 젊은이들에게 지금이라도 자신의 타임머신을 만들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되돌아볼 것 없는 인생은 너무나 쓸쓸하고 허전하지 않을까?

조화유 재미 칼럼니스트·소설가 < johbooks@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