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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스페이스와 자유의 곤경 [1]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겹쳐진 세계

컴퓨터 없는 사무실, 연구실을 생각할 수 있는가? 오늘날 이메일, 인터넷 없이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은 20년 전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퍼스널 컴퓨터, 이메일, 인터넷이 일상 속에 들어와 있지 않았던 그때는 이미 기억 저편으로 물러났다. 편하고 저렴한 통신, 풍부하다 못해 넘쳐나는 정보, 어떤 곳·어떤 시간 속으로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자유 등 ― 이메일과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삶과 행위의 가능성이 펼쳐지고 있다. 모든 기술적 혁신은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낸다. 자동차에 의해 老年의 여행, 奧地여행, 가족만의 여행에 대한 욕구가 성장했듯이, 인터넷은 국경과 문화와 인종을 넘어선 교류, 연대, 의견교환이라는 욕구를 창출하고 있으며,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상품, 조직, 경제를 만들어내려는 욕망 또한 자극한다. 이것은 정말 새로운 세계일 것이다.

새로 열리는 세계, 그것의 존재론적 구조는 조금 특별하다. 분명 새로운 세계는 닥쳐오고 있지만, 옛날 세계를 대체하는 방식으로 오지는 않는다. 예전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으며, 다만 새로운 세계가 그 위에 덧씌워질 뿐이다. 우리의 여전한 일상 위에 정교한 통신망과 정보처리능력에 의해 만들어진 또 하나의 세계, 인공의 세계가 겹쳐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대두하는 세계는 본질적으로 두 겹의 구조를 갖는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세계의 새로운 겹에 대한 이름이다.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라는 SF소설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냈다고 알려져 있는 이 新種 어휘는 원형적으로는 컴퓨터와 네트워크의 복합기술이 가능하게 해주는 경험 내지는 현상의 특별한 유형을 의미한다. 디지털 컴퓨터 위에 (흔히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고 불리는) 인간/기계 인터페이스interface 기술이 덧붙여지고, 다시 그것이 네트워크에 의해 결합되면서 열리는 상호작용의 場 ― 개개의 컴퓨터를 입구로 삼아 들어서는 그 곳에서는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물질의 질서가 사라지고 대신 정보라는 半물질의 기상천외한 논리가 작동하는 별천지다. 건축학자이자 사이버스페이스의 선구적인 이론가인 마이클 베네딕트Michael Benedikt는 그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사이버스페이스는 全지구적으로 네트워크화된, 컴퓨터에 의해 유지되는, 컴퓨터에 의해 접근가능한,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다차원적이며 인공적 또는 ''가상적인'' 현실이다. 모든 컴퓨터가 하나의 창인 이 현실에서 보이거나 들리는 모든 대상은 물리적이지도 않으며, 반드시 물리적 대상의 표상일 필요도 없다. 그것은 차라리 그 형식이나 성격, 행위에 있어서 순수정보, 데이터로 만들어진 것이다.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는 여러 가지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가상현실〉이라는 지적/오락적 경험의 수단으로서, 지구를 실시간real time으로 묶어내는 통신수단으로서, 국경을 넘어서는 경제의 채널로서, 지식 소통 및 확산의 새로운 통로로서 등등. 이들 사건들은 모두 중대한 변화의 단서들이다. 지식이 보다 손쉽게 그리고 저렴하게 확산된다면, 경제가 세계적 규모로 재편성된다면, 강도 높은 오락의 경험이 일상으로 뿌리내린다면, 어느 곳과도 값싸고 선명하게 통신할 수 있다면, 세상은 놀랍게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새로운 상호작용의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만나는 방식을 급변시키는 능력, 바로 그 점에서 사이버스페이스는 경제, 지식, 오락의 사건을 넘어선다.

사이버스페이스로부터의 중요한 변화들은 일차적으로 정보와 컴퓨터의 기술적 능력에서 비롯되지만, 한편으로는 그 기술적 능력에 의해 배양된 새로운 인간행위의 형식을 매개로 해서만 전진한다. 손쉽게 지식/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것, 어느 곳·어느 시간 속으로든 마구 뛰어들 수 있다는 것, 마음대로 옮겨갈 수 있으며 제약받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것 ― 인터넷을 통해 실감하고 있는 그 능력들이야말로 경제, 사회, 오락, 지식의 모든 변화를 가능케 하는 인간적 뿌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이버스페이스는 자유의 공간이다. 마음껏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의미로서의 자유야말로 사이버스페이스의 철학적 본질이다.

여기서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문제는 철학 그리고 윤리와 만난다. 그것이 기술과 사회학적 변화를 넘어서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변형이기 때문이다. 경험이되 公共의 경험이며, 기존의 어떤 기술이나 매체와도 다른 방식으로 거주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컴퓨터와 네트워크의 기술이 결합하여 이뤄내는 일개 현상 혹은 경험유형에 불과한 것이 특별한 공간 또는 세계라고 은유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시 말하건대 인터넷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의 철학적 중요성은 〈더불어 삶〉의 새로운 방식/조건을 창출해준다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물음을 피할 수 없다. 물질세계의 관성과 저항이 극소화되는 자유의 공간은 인간에게 그리고 문명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자유의 증폭은 인간과 문명을 윤택하게 해줄 것인가?

사이버스페이스와 자유

사이버스페이스 속에 내재하는 자유의 잠재력은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그 기대는 순결하고도 화려하다. 물질세계의 칙칙한 慣性을 벗어 던짐으로써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순도의 자유, 이성, 상상력의 질서가 구현되는 공간이 되리라! 물질공간 속을 움직임으로써 불가피하게 생겨날 수밖에 없는 비능률, 화학적-정보적 오염과 부패도 사라지리라! 이제 우리들 세계는 새롭게 정화되리라!

실제로 정보 네트워크에 의해서 매개되는 인간의 관계는 이전의 것과는 크게 다를 수 있다. 거기서는 피부색이나 성별도 문제되지 않으며 폭력의 위협도 사라지고, 거절당할 걱정 없이 타인에게 말걸 수 있는 親愛의 공간이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초창기 예찬자들에 의해 사이버스페이스는 부활한 〈전자광장electronic agora〉으로 비유되곤 하였다. 각기 고립되어 있으나 네트워크를 통해 폭력이나 감염의 위험없이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자 광장. 그 연장선상에서 사이버스페이스는 〈천상의 도시〉라는 비전으로 채색되기도 한다. 사이버스페이스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렸던, 이제 되찾을 희망이 보이는 이상향이라는 것이다.

(타락 이전의) 에덴이 우리의 순진함, 아니 무지상태를 나타낸다면, 〈천상의 도시〉는 우리의 지혜, 지식 상태를 나타낸다. 에덴이 자연 물질계와 우리의 친밀한 접촉을 나타낸다면, 〈천상의 도시〉는 우리가 물질성과 자연 모두를 초월함을 나타낸다. 에덴이 상징화되지 않은 비사회적 현실의 세계를 나타낸다면, 〈천상의 도시〉는 개화된 인간상호작용과 형식과 정보의 세계를 나타낸다. ---- 〈천상의 도시〉라는 이미지는 사실상 --- 사이버스페이스의 종교적 비전이다."

이는 결코 공상의 약속만은 아니다. 인터넷의 체험이 알려주듯 사이버스페이스는 분명 자유의 의미있는 전진일 수 있다.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와 대중영합주의populism 같은 인터넷의 사회학적 특성들, 국경이라는 정치적 경계도 지워지고, 기술적 장비와 약간의 지적 노하우 만을 갖춘다면 누구에게나 진입과 소통이 허용되는 곳으로서의 사이버스페이스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경험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현실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를 제한 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弱者들에게 이는 더욱 뚜렷이 실감된다.

젊은 여성들의 온라인 공동체 〈달나라 딸세포〉의 체험이 좋은 예가 된다. 그들은 오직 비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남성들의 힘과 눈초리를 벗어나 주눅들지 않고 모일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 하나로 네트워크에 들어선다. 거기서 특별한 집단을 만들었고 여성으로서 현실의 시선들에 주눅들지 않는 만남, 말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경험한다. "IMF 초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 종이값은 우리들이 인쇄매체로 가는 길을 막았는데, 그때 우리들이 발견한 것이 웹이라는 매체였다. … 그때까지 우리에게 사이버 페미니즘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단지 인쇄매체 대용품으로 웹을 발견했을 뿐이니까." "우리가 처음으로 사이버스페이스에 접속하면서 느꼈던 짜릿함은 바로 여성이라는 질긴 육체성의 질곡으로부터 풀려났다는 느낌이었다."3)

현실에서 이미 자유를 훼손당한 사람들에게 사이버스페이스는 구원일 수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값싸고 손쉽게 그리고 기성 권위의 압박을 무시한 채 무엇이라도 시작해볼 수 있는 전대미문의 공간이다. 약한 이들, 새로 시작하고 싶은 자, 달리 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녕 희망의 장소이다. 성별, 나이, 피부색, 국적, 경제적 신분 등이 모두 불문에 붙여질 수 있는 곳이 사이버스페이스 말고 어디에 있을까? 정보와 지식들을 그토록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하여 우리는 국가라는 정치적 간섭, 비용이라는 경제적 간섭, 전통이라는 사회적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자기 정체성이라는 심리-역사적 간섭, 그리고 時空間이라는 형이상학적 간섭마저도 떨쳐버릴 수 있다. 더 이상 전통이나 명분, 관계에 의해 변색되지 않은 진정한 자아, 진정한 만남, 진정한 연대의 출발점이 거기에 있을 듯하다.

사이버스페이스가 증폭시켜주는 자유를 통해 민주주의의 밝은 장래를 기대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획기적인 통신망을 통하여 충분한 정보가 공급되고, 현실권력의 외적, 내적 검열로부터 벗어나며, 자유로운 연대의 가능성이 보장되고,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해짐으로써 민주주의는 다시금 역사적 원형의 모습, 대등한 개인들이 함께 토론하고 결정짓는 고대 희랍의 그 형태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희망하는 것은 결코 과장스럽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사태의 전부는 아니다. 돈 없고 권력 없는 젊은 여성들에게 기회의 공간인 그 곳은 동시에 그들 젊은 여성들에게 아무런 제약 없이 욕설하고 모욕할 수 있는 무례/폭력의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보편과 평등의 공간인 인터넷, 사이버 스페이스는 동시에 언어적 폭력, 절제되지 않은 음란성, 무의미한 시간낭비가 난무하는 곳이다. 비판의 가혹한 눈길로 응시할 때, 그곳은 모든 잠재적 미덕이 가지고 있던 어둠이 두 배가 되는 곳, 자유가 능욕당하고 괴롭힐 자유가 되는 곳, 익명성은 음란전화의 익명성이 되고 물리적 육체로부터의 자유는 다른 누군가의 가상의 육체를 고문하기 위한 라이센스가 되는 그런 세계로 나타난다.

역설은 또 있다. 예찬자들은 사이버스페이스가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능동성과 TV의 손쉬운 해독력을 결합시키는 놀라운 효과를 과시하리라 호언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인터넷에서 보게 되는 것은 정반대이다. 중독성, 수동성과 같이 TV의 가장 나쁜 것들과 피상적인 것에 대한 자의식적 탐닉, 잡담의 문화화, 견제되지 않는 충동의 증식 등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나쁜 것이 결합된 예상 밖의 타락이 만연하고 있다.

궁금하지 않은가?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 희망의 꿈이 쉽사리 악몽의 형태로 변전한다는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긍정적 가능성은 뒷편으로 밀려나고 그 어두움만이 실현되는 것일까? 사이버스페이스를 가득 채우는 새로운 오염들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기술낙관론자들이 말하듯 단순히 진보의 부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보수주의자들이 그러하듯 인간성의 유구한 사악함으로 이해해야할까? 그렇다면 진부한 문제다. 그 문제라면 여기서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달리 이해하는 방식은 없을까? 사이버스페이스라는 특별한 공간형식, 자유를 증폭시키는 공간형식이 조장해주는 인간행위의 양태로부터 이 사태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거기서 자유라는 주제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이봉재 / 서울산업대 인문자연학과 교수
자료제공 : emerge새천년(http://emerge.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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