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칼럼] 살아 숨쉬는 한·미 동맹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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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2월 22일, 엄동설한에 1백2명의 한국 이민단을 싣고 제물포를 떠난 미국증기선 게릭호는 태평양을 횡단하여 목적지인 하와이를 향하며 새해를 맞이 하였다.

성인남자 56명, 여자 21명, 미성년자 25명으로 구성된 이민단은 지금으로부터 꼭 1백년 전인 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이민의 나라 미국에서 한인 교포사회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그 후 우리의 외교권을 상실하게 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있기까지 불과 2년 동안에 총 7천8백43명의 한국인이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일제 하에서 중단되었던 미국이민은 한국전쟁 후에 재개되어 해를 거듭할수록 그 수는 급증하였고 드디어 2000년 말 주미 공관이 추산한 재미동포 사회의 규모는 대략 2백12만 명에 이르고 있다. 뉴욕과 LA 총영사관의 관할 지역에는 각각 50만명 이상의 한국동포가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숫자를 제시하는 것은 한국인에게 있어 미국은 단순히 하나의 외국이 아니라 전 세계로 뻗어나간 민족공동체의 중요한 생활 터전이란 사실을 되새겨 보려는 것이다.

그 동안 한.미 유대관계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면에서 계속 발전돼어 왔지만, 200만이 넘는 우리의 재미 동포들이야 말로 살아 숨쉬는 동맹관계를 가장 극명하게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 한국이 처한 특수한 사정

올해 2003년은 미국 이민 100주년인 동시에 한.미 상호조약 50주년이 되는 해다. 1953년 그토록 많은 희생자와 한반도의 초토화를 가져온 전쟁이 분명한 결말 없이 휴전협정으로 이어진 직후 맺어진 한.미 방위조약이 우리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가능케 한 안보와 안정에 기틀이 된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오늘, 민주정치와 시장경제를 제도화하는데 성공한 우리가 우리의 긍지와 꿈에 걸맞은 국제적 위상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미방위조약 50주년을 한.미관계의 오늘과 내일에 대한 새로운 비젼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민 1백주년, 방위조약 50주년인 올해는 북핵문제, SOFA문제 등 긴박한 현안이 겹쳐 한.미관계에 대한 심각한 재조명이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서의 논의는 물론 한.미간의 대화에 있어서도 한.미관계의 특수성, 즉 우리는 가장 가까운 우방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미간에는 아무리 어렵고 엇갈리는 대화나 협상에 임하더라도 우리는 친구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지혜에 의존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함께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한국이 처한 특수한 사정, 즉 한반도는 예외지대라는 사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세계는 탈 냉전시대로 접어든 지 이미 10년이 지났지만 한반도에서만은 아직도 냉전시대의 분단과 대결이 지속되고 있다.

한국인은 그들의 민주정치와 시장경제를 선택한 자유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하지만 그와 동시에 평화적 민족통일에 대한 꿈도 결코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미국은 이해해야 된다.

한편, 한국은 오늘의 미국이 지닌 특수한 국가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미국은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유일 초강대국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미국도 외부공격으로부터 절대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이 9.11테러공격으로 증명되었다. 그 후 미국은 초강대국이란 자신감과 여유보다는 언제든지 테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과 불안에 휩쓸리고 있다.

*** 北核 등 협력관계 조율을

그러기에 북핵문제가 수반하는 일차적 위협이나 위험은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당면한 것이며, 미국에는 강 건너 불과 같은 이차적 중요성밖에 없다는 인식은 양국간에 불필요한 오해를 자아낼 수 있다. 미국에서는 핵무기의 확산과 테러집단의 연계 가능성은 미국의 안전에 대한 분명하고 직접적인 위협이란 인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협력관계를 조정해야 할 중대한 고비에 서 있는 것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前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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