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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유적지 담벽에 왠 룸살롱 간판 '경악'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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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화하(華夏)문명의 발상지 뤄양. 천년고도의 위용은 사라졌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문인 리징문에선 정취 있는 옛 거리 난다제를 볼 수 있다.

선사에서 고대까지 달리는 87㎞의 길은 검다. 중국 대륙에서 처음으로 신석기 유물이 발견된 허난(河南)성 몐츠(<6FA0>池)현과 화하(華夏) 민족의 발상지 뤄양(洛陽)을 잇는 310번 국도는 트럭에서 흘리고 간 석탄들로 중앙차선마저 지워졌다.

길가에서는 석탄을 쌓아놓고 판다. 먼지바람에다 공장 연기까지 합세해서 회색의 도시경관에 부족함이 없다. 마스크의 안쪽까지 시커멓다. 내 수첩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아황산가스, 일산화탄소, 분진, 소음, 훼손된 노면, 흙바람…’.

그래도 길의 굴곡이 점차 내게 유리하게 바뀌면서 친링(秦嶺)과 타이항(太行) 산맥의 포위망을 뚫고 중원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게 감지된다. 시안(西安)부터 따지면 뤄양까지는 370㎞다. 중국 역사에서 쌍벽을 이루는 두 천년제도(千年帝都)가 의외로 인접한 이유를 알겠다.

시안은 관중평원, 뤄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원을 봉토로 거느린 제후 같아서 천년의 번영을 누릴 각자의 자산이 있었다. 둘 사이엔 국가의 경계가 되기에는 낮고 수도의 경계가 되기에는 충분히 높은 산지와 협곡이 있다. 둘은 당(唐)대까지 통일왕조 수도의 지위를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고대의 통치자들은 둘이 사이좋게 지내도록 동경(뤄양)과 서경(시안)으로 부르기도 했다.

9개 왕조 수도, 뤄양의 위용은 간데없고

둘 사이에서 가장 헷갈린 게 화산(華山)이다. 화산은 서쪽에 있는 시안이 수도일 때는 동악(東岳), 동쪽에 있는 뤄양이 수도가 되면 서악(西岳)으로 불렸다. 그건 뤄양도 마찬가지여서 후에 자신보다 동쪽에 있는 카이펑(開封)이 오대십국 시대의 진(晉)과 북송의 수도가 되자 졸지에 동경에서 서경으로 바뀌었다.

방위의 어지러운 전환은 다반사였다. 베이징(北京)마저 동북부를 장악한 요나라 시절에는 남경(南京)으로 불렸다. 중국에서 고정불변은 없다.

뤄양과 시안은 중세 이후에는 북방 유목민족의 남하와 남방의 풍부한 먹거리의 흡인력에 수도가 동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동시에 쇠락했다. 중국의 수도는 그 후 카이펑·항저우(杭州)·베이징·난징(南京) 등 동쪽에서만 맴돈다. 파괴적인 쇠락이었나 보다.

뤄양 일대에는 지금도 화려한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 백마사, 관우의 수급(首級)이 안치돼 있는 관림, 용문석굴, 조금 더 남쪽으로 가면 소림사 등 찬란한 유적이 많지만 뤄양이 9개 왕조의 수도였음을 말해주는 위용은 없다. 측천무후가 살던 당대의 천당(天堂)과 명당(明堂)은 현재 복구 중이다. 북위의 고성은 유적지를 알리는 파란색 펼침막이 없다면 밀밭 한가운데 있는 성가신 돌무더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간은 기억을 희롱한다. 기억을 지우기도, 때로는 지워진 기억을 살리기도 한다. 1921년 몐츠현 양샤오(仰韶)촌에서 발굴된 채도의 도기는 중국에 신석기의 도래를 알렸다. ‘도래’인 이유는 중국이 시간이 지날수록 문명의 연대표가 올라가는 희한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에서 서남쪽으로 50㎞ 떨어진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는 현생 인류로의 진화 과정에서 고리 역할을 하는 직립인(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도 발견됐다. 이 발굴로 중국 땅에서 불이 사용된 흔적은 최대 75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양쪽 발굴의 공통점은 모두 스웨덴 고고학자 요한 군나르 안데르손이 발굴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역시 ‘제국주의의 공범’으로 낙인찍혔다가 문화대혁명 이후 ‘비범한 학자’로 복권되는 곡절을 겪었다.

양샤오 문화관의 마당에는 네 명의 흉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당연히 안데르손이 서열상 첫째다. 지질학자인 그는 남극 탐사에서 허탕 치고 실의에 빠져있을 때 중국 북양정부의 광산고문으로 일해달라는 제안에 응해 중국에서 많은 광산과 유적을 발굴했다.

꿩 먹고 알 먹기였다. 제국주의 공범으로 몰릴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중국과 스웨덴은 그가 발굴한 모든 유적을 스톡홀름의 고고학연구소로 가져가 연구와 고증을 거친 뒤 반반씩 나누기로 했다. 문화유물을 장물처럼 기여한 몫대로 나눈다는 발상이 훗날에 보면 비난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문물 침탈의 역사에 비춰보면 오히려 공정한 조건이었다. 중국은 20세기 초까지 서방의 고고학자·지질학자·지리학자·고생물학자 등에게는 골드 러시(gold rush)를 촉발한 미 서부 못지않은 ‘황금광’이었다. 문물이 약탈·매수되고 파괴됐으며 학자들은 이름까지 얻었다.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중국으로선 반분하는 조건조차 고마울 뿐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반도 스웨덴에서 보내 난징에 도착한 것까지는 확인됐지만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저우커우뎬에서 발굴된 최초의 두개골 5개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중 통째로 사라졌다. 정치적 외풍이 심한 중국에서는 보존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1 스웨덴 지질학자 요한 안데르손의 동상. 그는 중국 북양 정부의 광산고문을 지내며 양샤오 유적 등 수많은 유적을 발굴했다. 2 난다제엔 수십 가지 표주박을 파는 이 가게처럼 개성 있는 상점이 많다. 3 양샤오촌에선 1921년 중국 최초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됐다.

높다란 성곽 담벽엔 가라오케 술집 간판

그래서 그런지 양샤오 문화관은 특수부대가 와도 막아낼 요새처럼 생겼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도기 형상의 건축물이지만 내게는 진짜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철통 진지였다. 도착 시간은 낮 12시를 갓 넘겼을 때였다. 정문 수위의 말로는 점심 시간이어서 앞으로 두 시간 반 이후 다시 연다고 한다. 두 시간 반을 기다리면 오늘 목적지인 뤄양까지 갈 수 없다. 그렇다고 ‘선사 시대’에 하루를 더 체류할 수는 없다.

나는 진입하기 위해 문화관을 한 바퀴 돌았다. 뒤편에 현관문이 있긴 한데 자물쇠로 잠겨 있다. 안에선 인기척이 느껴진다. 문을 흔들고 두드려 본다. 반응이 없다. 다시 앞으로 가서 ‘정면돌파’를 시도하지만 소득이 없다. 곡괭이가 옆에 없었기에 망정이지….

나처럼 성가시게 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인지, 웬만하면 내다볼 텐데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철밥통(鐵飯碗)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중국에서 공무원을 부르는 속칭이다. 대낮에 두 시간 반을 걸어 잠그고 있다. 유물뿐 아니라 직원들의 점심 휴식을 지키기에 용이하게 양샤오 문화관은 설계돼 있다.

사실 문화 유적으로서는 더 두려워할 적이 내부에 있었다. 중국은 스스로 파괴한 것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집안에 가보로 모셔놓은 도자기를 다른 집 아이가 깨뜨릴 때만 심각한 문제가 된다. 중국은 1950년대에 명대 황제들의 능묘인 명십삼릉(明十三陵) 중 정릉(定陵)을 발굴했지만 여기서 나온 만력제의 유해와 관은 문화대혁명기에 ‘착취계급의 우두머리’라는 이유로 소각됐다.

이 문제로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시대의 비극이라고만 일컬을 뿐. 한 곳에서 5000년 이상 끊이지 않고 이어온 세계 유일한 문화권이라는 영예의 이면에는 과거를 지속적으로 지워온 파괴의 역사가 있다.

그래도 중국이 대단한 건 여전히 많은 문물과 유적이 남아 있고 새로 발굴된다는 점이다. 신석기 유적은 양샤오촌에 기대지 않아도 될 만큼 황허 중·상류와 양쯔강 하류에서 다양하게 발굴돼 왔다. 저우커우뎬에서도 이후 훨씬 많은 베이징 원인의 두개골과 뼈가 나왔다.

그리고 지금도 과거의 유적들은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쉰다. 뤄양에 남아 있는 성곽은 명대에 쌓은 리징먼(麗景門)밖에 없다. 아름다운 리징먼의 높다란 담벽에는 ‘려경문 KTV’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KTV는 가라오케 술집을 뜻한다. 서울 동대문에 룸살롱 간판을 붙여놓은 걸로 생각하면 된다. 유적에 대한 결례보다는 어떻게든 유용성을 입증해 살아보려는 성벽의 악착 같은 생활력이 느껴진다.

리징먼도 하필이면 보수 공사 중이어서 철거되고 얼마 안 남은 성벽조차 걸을 수 없었다. 인부들과 먼저 말을 튼다. 장젠샤오(姜見召)씨는 반농반공(半農半工)이다. 뤄양 근처에서 농사를 짓다가 일거리가 있으면 뤄양으로 올라온다.

인부들의 한 달 수입은 4000위안(75만원). 내가 다른 곳과 비교해서 “많네”라고 말하자 장은 “물가가 얼마나 오르는데…” 하고 손사래를 쳤다. 항상 그렇듯 얘기를 나누다 보면 꼭 나이 알아맞히기로 화제가 넘어간다. 장은 내 나이를 듣고는 “내가 한 살 많아”라고 소리쳤다.

다가와서 내 눈 밑까지 공민증을 들이민다. 여기도 ‘민증 까는 문화’가 있다. “그래, 알았어. 형(大哥)이라고 불러줄게”라고 말하자 네댓 명의 인부들이 한바탕 웃었다. 리징먼 누각에서 국경을 넘어선 의형제가 맺어진다. 이제 성벽은 내게 출입허용지역으로 바뀐다. 동생을 누가 막겠는가.

뤄양은 한글 발음인 낙양으로 불러야 제 맛이 난다. ‘낙양’ 하면 마치 다른 나라가 아닌, 한국의 고도와 같은 동질감과 애잔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리징먼 성벽에서 낙양을 내려다 본다. 몰락한 이후에도 민초들의 삶은 면면히 이어져왔음에 분명하다.

세월에 지붕은 잿빛으로 바래고 발길에 포석은 닳아 조약돌처럼 반질반질하다. 난다제(南大街)는 삐뚤빼뚤 뻗어가고 사람들은 시냇물 위의 낙엽처럼 떠다닌다. 리징먼에서는 마치 시간의 전망대에서 초고속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시간이 느릿느릿 흐르는 게 보인다.

글·사진 =홍은택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저자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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