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상심한 아버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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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일주일 전 한 조간신문 가판에 5단 크기 광고가 실렸다. 제목은 '아.들.에. 게'. 광고주는 '나라를 걱정하는 아버지들의 모임'이었다.

"이번 대선 때문에 너와 내가 밤새워 논쟁을 한 일이 몇번이더냐. 투표일이 얼마 안남아 그간 내가 한 말들을 글로 정리해 너에게 준다." 이런 취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음 두가지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는 현 정부 햇볕정책이 기만이라는 것이다.

현 정부가 햇볕정책이 유일한 통일 정책대안인 양 국민의식을 변화시킬 때 북한은 등 뒤에 폭탄을 감추고 미소작전으로 우리를 현란케 했다. 북한의 핵위협에 속수무책인데 이젠 북의 자비에 매달려야 하는 이런 질곡에서 누가 우리를 해방시켜줄 것인가.

또하나, 경제성장의 장애요인은 노사문제다.

파업이 계속되면 기업이 망하고 나라가 거덜난다. 강성노조 최대 피해자는 결국 노동자고 국민이다. 평등주의와 복지지상주의로 망한 아르헨티나로 갈 것인가, 싱가포르를 선택할 것인가 기로에 서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라 걱정 아버지 모임은 "신문은 행간을 읽고 TV는 화면 뒤를 보아라. 감성이 강한 젊은이들은 화면만 보고 매력적인 목소리에 도취되어버린다. 네가 성숙한 젊은이라면 깊은 고민을 할 때다"라고 경고한다.

누굴 위한 광고문인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그런 탓인지 다음날 시내배달판에선 다른 광고로 바뀌어 있었다.

*** 가판서 사라진 신문광고문

가판에서 사라진 신문광고문을 장황하게 인용하는 까닭은 이 글속에 우리 사회 보수세력들의 정치.투표성향이 잘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선거가 끝난 지 보름이 지났고 해가 바뀌었건만 아직도 TV를 보지 않는 사람, 이럴수가! 한탄하며 술만 마시는 사람, 나라가 어떻게 될지 한숨 짓는 아버지 세대의 근심은 줄지 않고 있다.

이들 중엔 기득권세력이나 정파적 이해와 맞물려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파적 이해와 관계없이 정말 순수하게 나라를 걱정하는 '꼰대들'이 줄지 않고 있다.

중앙일보 경제섹션엔 '우리집 경제교육'이라는 난이 있다. 그 중 KSS해운 박종규 회장의 글이 돋보인다.

그는 결혼 초 사글셋방이 너무 좁아 갓난애를 가운데 누이고 부부가 양쪽에서 모로 누워자는 생활에서 출발한다. 선박회사를 꾸려가면서도 버스를 타고 10평짜리 아파트에서 살아 위장간첩으로 오인된 적도 있다.

세 아들을 미국유학 보냈지만 모두가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마련토록 했다. 지금도 골프장 갈 땐 아들이 데려다 주고 1만원을 주는 식의 근검절약으로 평생을 살았다.

이 나라를 오늘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까지 바로 이런 건강한 보수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들 세력들이 낙담하고 불안해한다면 이게 바로 나라를 위태롭게 할 큰 일 아닌가.

왜 기득권 보수세력들이 낙담하고 있을까. 다른 후보가 당선됐다면 이런 근심.걱정은 없었을까. 앞의 광고문에 나와있듯 북핵과 경제 걱정은 어느 누가 당선됐다 한들 풀기 어려운 국가적 난제다.

노무현 당선자도 이미 이런 우려를 감지한듯 북핵문제를 국가의 생존문제라고 보고 조심스런 접근자세를 피력했다. 경제문제에 관해서도 경제의 큰 틀을 흔들지 않는 범위 안에서 투명성을 강조했다. 한나라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 국가경영의 틀을 하루아침에 흔들어 놓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해보자.

장성한 아들을 둔 아버지 세대의 근심은 누가 대통령이냐보다 자신이 이 사회의 주역에서 퇴출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견인차가 그들이었듯 앞으로도 이 사회를 이끌고 갈 중심세력 또한 그들이라는 점 잊어선 안된다.

*** 아버지 세대 할 일 남았다

3김시대가 종언을 고했다. 그렇다고 새 시대를 이끌어 갈 중심세력으로서 나라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역할이 끝난 게 아니다. 젊은이들의 감성과 그들의 욕구가 뭣인지 귀기울이며 그릇된 감성은 준엄하게 꾸짖고 바로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이 남아 있다.

한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오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난 세월을 탓하고 밀려 오는 물결을 거부할수 없다. 유권자 45%의 중심세력이 정권 비토세력이 돼선 나라꼴이 안된다. 잘못되면 비판하고 건전한 대안을 내놓는 데 보다 적극적이고 보다 긍정적이어야 한다.

상심한 아버지들이여! 이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건강한 정신, 강한 실천력으로 새 해 새 일을 꾸며보자.

권영빈 <중앙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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