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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화학강국다운 산재사고 대응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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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문 일
연세대 화공생명공학과 교수

한국의 화학산업은 생산기준으로 세계 5위에 이른다. 이런 화학 강국에서 지난달 27일 발생한 경북 구미의 불산 누출 사고와 그 대응은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에서 산업재해 피해는 매년 15조원이고 사망자도 2200여 명이나 된다. 그중 화학제조업에서의 사고는 지난해 2874건, 재해 피해자는 2900명에 이른다. 이를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대책과 지원이 필요하다.

 첫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국가 차원의 화학사고 안전관리를 위한 국가화생방안전관리위원회가 설립돼야 한다. 안전과 관련한 제도·정책·인프라의 선진화를 담당하는 독립적·전문적 기구다. 여기서 재난·안전사고의 원인을 파악해 안전관리 권고안을 내고 이를 기반으로 부처 간 역할을 조정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대기정화법에 따라 의회 산하기구인 미국화학사고조사위원회(CSB)를 운영 중이다.

 둘째, 화생방을 비롯한 유해화학물질 사고 발생의 예방·대응에 관한 법률을 재정비해야 한다. 관련법으로 환경부의 유해화학물질관리법, 고용노동부의 산업안전보건법, 지식경제부의 고압가스안전관리법, 소방방재청의 위험물안전관리법, 행정안전부의 재난및안전관리기본법 등이 있다. 이렇게 부처별로 분산된 법들의 사각지대가 있는지 살펴보고 이런 법들이 보다 유기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재정비가 필요하다.

 셋째, 유해화학사고 발생 시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운영할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번 구미 불산 사고는 허술한 초동대응으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화학물질은 특수하기 때문에 전문 지식이 있어야 발빠른 대응으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현재 화학공장이 밀집해 있는 여수나 울산과 같은 화학공업단지에만 화학소방대가 설치돼 있을 뿐 다량의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전자회사와 같은 비화학업종 밀집지역에는 화학소방대가 없다. 비화학업종일지라도 화학물질을 많이 다루는 산업지역에는 이를 설치해야 한다. 아울러 초동대응과 재난구조 및 복구 과정에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매뉴얼이 필요하고 엄격한 적용을 위한 훈련이 평소에 이뤄질 수 있도록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

 넷째, 화생방 사고를 통합 관리하는 주민보호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이번 구미사고와 같은 화생방사고가 발생했을 때 컴퓨터 계산을 통해 누출범위를 재빨리 GPS 위에 표시해 인근 초동 대응기관에 보고토록 하고 이들 기관은 지방공무원과 대피·치료가 가능한 병원 등으로 연락해 유기적으로 대응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할 컴퓨터 기반 기술의 개발도 필요하다.

 다섯째, 소규모 사업장도 화학사고에 대비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화학사고 발생 시 공장 내부지역에 대해서는 노동부 주관의 공정안전관리(PSM) 제도로 관리하고 공장 외부는 지자체와 환경부의 관할지역으로 자체방재계획이라는 제도로 관리하고 있다. 이번의 경우와 같이 30인 이하의 소규모 사업장에 대한 화학안전관리는 법의 사각지대에 있다. 또 고용노동부령에서는 근로자들의 유해성 기준 설정 시 물질로부터 8시간 노출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 안전을 위해서는 24시간 노출에 대한 연구 자료가 있어야 하나 지금은 없다. 정부 간섭의 최소화는 경기부양을 위해 필요하지만 공공의 안전에 관한 법은 선진국 수준으로 강화해야 한다.

 그동안 많은 대책이 건의됐지만 예산 우선순위에 밀리고 규제 철폐를 주장하는 사회 분위기에 밀려 화학사고에 대비하는 규제가 약해지고 관리도 허술해졌다. 이제는 선진국 수준으로 대비해야 한다. 공공 안전이 주민 복지의 기본이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격이지만 이번 구미 불산 누출 사고를 계기로 화학사고를 막을 수 있는 튼튼하고 안전한 외양간을 만들어야 한다.

문일 연세대 화공생명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