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with] 임보용씨의 황홀한 '리움' 1일 큐레이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9면

▶ "전시대 중앙에서 약간 아래쪽에 걸어야 관객들이 편하게 감상할 수 있죠." 임보용(右)씨와 큐레이터 박서운숙씨.

동덕여대 회화과 2년 임보용(22)씨. 유치원 때 미술과 인연을 맺은 뒤 한순간도 붓을 놓은 적이 없는 16년 경력의 예비 대가다.

그래봐야 멀고 먼 예술의 길에 겨우 첫 발을 들여놓은 셈이지만 지난해 그녀는 인생이 걸린 갈등을 겪어야 했다. 미술학부 시절 큐레이터 과목을 들으면서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묘한 매력을 느꼈던 것. 주제를 정해 전시를 기획하고 그에 걸맞은 전시장 디자인과 조명을 꾸며 관객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흥행사적 요소가 그녀를 전율시켰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을 포기하기도 어려운 일. 보용씨는 "좀 더 경험을 쌓은 뒤 진로를 바꿔도 늦지 않다"는 주위의 조언을 받아들여 회화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알기라도 하듯 튀어나온 Week&의 독자체험, 이게 나를 위한 게 아니고 뭐냔 말이다. 곧바로 삼성미술관 리움(Leeum)으로 달려갔다.

리움의 기획 전시장 블랙박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렘 쿨하스의 작품으로 검은색 콘크리트로 만든 독창적 구조가 인상적이다. 19일부터 열리는 리움의 첫 기획전 '이중섭 드로잉:그리움의 편린들'전 준비가 한창이다.

"연구원이었다가 출판사 직원, 나중엔 인테리어 기사가 되는 게 큐레이터죠."

리움의 박서운숙 전임연구원이 시작부터 보용씨의 기를 죽인다. 기획 단계에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토론하다 일단 정해지면 전시회의 성격과 작품에 대한 글을 수없이 써야 하고 이어 작품을 이리 저리 옮겨보고 디자인과 조명을 바꾸는 현장 지휘를 하는 큐레이터 일에 대한 설명이다. 그렇다고 기 죽을 보용씨가 아니다. 그게 좋아서 큐레이터를 하려고 했던거 아닌가. 철통 보안 시설을 거쳐 블랙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곧 벽에 매달릴 그림들이 바닥 방석 위에 얌전히 놓여 있다. 앗, 저게 이중섭의 그림들이란 말인가. 갑자기 혈류 속도가 빨라지며 숨이 가빠져 온다. 위대한 거장들의 그림을 손에 들고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큐레이터의 특권이다. 정말 이중섭이다. 펜으로 선을 긋고 유화 물감을 수채화처럼 칠했다. 주제와 배경과의 원근감은 무시됐다.

박 연구원이 눈치를 챘는지 한마디 한다.

"정말 색감이 아름답죠? 도록에서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어요."

잔소리도 잊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소품이라도 절대로 한 손으로 들면 안돼요. 그리고 작품 앞에서는 말을 많이 하면 안 됩니다. 침이 튀면 곤란하니까."

사실 큐레이터 일을 하루 동안 체험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겉핥기가 아니다. 준비만 수 년씩 걸리는 전시도 허다한데 말이다. 아쉽지만 어쩌랴. 이전 과정은 설명으로 대신했다.

첫 기획전인 만큼 작가 선정이 쉽진 않았단다. 하지만 이중섭으로 의견이 모아지자 이견이 없었다. 한국의 대표적 작가면서도 국제 무대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는 데 모든 큐레이터들이 동의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소장가들을 설득해 작품을 모으는 것도 큐레이터의 몫이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것들은 국내 최고 전문가들의 복원 작업도 거쳤다. 위작 논란이 많은 작가라 이야기도 많다. 어떤 작품은 서명이 가필되기도 하고 원래 서명이 없던 작품에 서명이 생겨나기도 한단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가짜는 아니다.

"작품 배치는 연대기, 색채, 장르, 아이디어 심지어 액자의 모양별로 다르게 할 수 있지요. 관객이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큐레이터가 선택해야 합니다. 이번 전시는 드로잉과 연필 소묘, 엽서화, 유화 등 5개 종류로 나눴어요. 전시실마다 분위기에 맞게 다른 색으로 벽을 칠했죠."

전시에도 진화가 이뤄진단다. 관객과 작품간 소통이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진화다. 어느 한 작품만 튀어도 곤란하다. 거는 높이는 한국인의 평균 신장을 고려할 때 지상에서 140㎝의 높이가 적당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말이 있다.

"큐레이터는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객을 연결하는 고리가 돼야 한다"는 박 연구원의 말이 보용씨의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심과 안목을 키우는 일이 중요하리라. 그렇다면 지난해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래 "편식 없는 체험" 그것이 내가 할 일이야. 리움을 떠나는 보용씨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경쾌해 보였다.

글=이훈범 기자<cielbleu@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