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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닫는 뉴욕제과 옆 다이소 '건재'한 이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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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서울 종로 옛 종로서적 자리에 있는 다이소 종각점에서 소비자들이 매장을 둘러보고 있다. 이곳에서 파는 상품은 절반 이상이 2000원 이하다. 다이소는 불황 속에서도 매장이 800개를 넘어서며 일자리 6000개를 창출했다. 이런 게 내수의 힘이다. [강정현 기자]

20일 낮 서울 홍익대 앞. 30년을 이어 온 리치몬드 제과점이 떠난 자리에 세 개의 매장이 들어서 있었다. 대기업 계열의 커피점과 휴대전화 판매점, 그리고 저가 물품 매장 다이소다. 다이소는 1000원, 2000원짜리 상품을 주로 파는 가게다. 이름을 날리던 제과점도 못 버틴 자리에서 버텨내는 비결은 뭘까. 매장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들른 직장인과 대학생 수십 명으로 붐볐다. 직장인 한지혜(26·여)씨는 “값도 싸지만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물건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다이소는 불황 속에서도 최근 3년간 매년 매장을 80개 이상씩 늘렸다. 옛 종로서적 자리에도 매장이 있다. 강남도 예외가 아니다. 약속 장소의 대명사인 강남역 뉴욕제과(ABC뉴욕제과)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며 문을 닫았지만 인근 다이소 매장은 건재하다. 매장이 늘면서 일자리도 덩달아 늘었다. 지난해만 600개 넘는 일자리를 만들었다. 내수산업의 힘이다. 홍대점의 최용주(41) 부점장도 3년 전 주부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지금은 정규직이 됐다. 안웅걸 다이소 이사는 “서민 경제를 북돋운다는 게 이런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나 다이소의 성공은 내수시장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자영업자의 절반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번듯한 서비스 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롯데마트는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먼저 100호점을 열었다. 당장의 경기 문제가 아니다. 미래 불안, 자산 불안, 소득 불안의 ‘3불’은 내수시장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쓸 돈이 없는 상황이 구조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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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 불안은 노후에 대한 걱정이다. 근로자 10명 중 7명(74.2%)은 노후를 걱정하고 있다. 은퇴가 코앞인 40·50대의 소비가 상대적으로 많이 줄었다. 주력 소비 계층이 약해진 것이다. 통계개발원에 따르면 1990년 40대는 30대보다 38.4%를 더 소비했고, 50대는 45%를 더 소비했다. 그러나 2010년 40대는 아랫세대보다 16%를 더 소비할 뿐이다. 50대의 소비는 30대에 비해 불과 4.4% 많다. 박시내 통계개발원 연구원은 “생물학적 수명은 늘어나는데 노동 수명은 짧아졌다”며 “이런 불안이 해소되지 않고선 중년층 소비가 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자산 불안은 발등의 불이다. 집값 하락으로 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이다시피 한 가계는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 집 사느라 빚도 잔뜩 냈다. 가계부채는 1000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장사하느라 낸 빚까지 안고 있다. 자영업자의 1인당 빚은 9656만원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빚 문제를 해소하지 않고선 소비 확대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소득 불안은 일자리 불안에서 시작됐다. 비정규직 수는 600만 명에 이른다. 성장이 둔화하면서 임금 상승 속도도 더뎌졌다. 상용직의 실질임금 상승률은 최근 4년 중 3년이 마이너스(2008년 -0.2%, 2009년 -0.5%, 2011년 -4.7%)였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경기 전망을 통해 “앞으로도 저성장이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3불’의 결과는 우울하다. 20일 판교신도시 중심 상가인 운중로 주변에 늘어선 10층 규모 빌딩 14개에는 ‘임대’ 안내판이 붙지 않은 곳이 없었다. 부동산 정보업체 에프알인베스트먼트에 따르면 이 지역 빌딩의 빈 상가·사무실은 전체의 절반(공실률 53.6%)이다. 판교도서관 인근에 들어선 유명 커피점은 6개월도 못 버티고 매물로 나왔다. 한 상인은 “건물 겉모양이야 다 그럴듯하지만 속사정은 말도 못한다”고 말했다. 자영업 부실·폐업, 대출 원리금에도 못 미치는 ‘깡통 상가’의 증가 등이 경제위기의 새 뇌관이 될 것이란 분석도 잇따르고 있다. 민간 소비가 지속적으로 위축될 경우 2020년 잠재성장률은 2011년에 비해 0.6%포인트 하락한다는 전망도 나왔다.

 해법은 역설적이지만 다시 내수에 있다. 세 가지 불안을 해소할 답은 뭐니뭐니해도 일자리다.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업종은 교육·보건(2010년 기준 10억원당 13.2명), 사회 서비스(9.2명), 부동산(7.2명), 금융·보험(5.1명) 등이다. 모두 서비스 업종이다. 2004~2011년 사이 제조업 취업자 수는 418만 명에서 409만 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서비스업은 영세업자의 진입·퇴출이 반복되는 속에서도 취업자 수가 759만 명에서 814만 명으로 늘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일자리를 늘리면서 동시에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의료·교육 등의 서비스업 규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풀 것을 제안했다. 변양규 한경연 거시정책연구실장은 “제주 국제학교의 경우 5개 기관이 중복적으로 행정 규제를 하고 있다”며 “실질적인 규제 개선 효과가 있도록 현장에서부터 애로사항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꾸준히 일할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굳이 전일제 근로만 고집할 이유도 없다. 여성·노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자는 얘기다. 한경연에 따르면 전체 일자리 중 파트타임 비중은 10%에도 못 미친다. 네덜란드는 35%가 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15% 수준이다. 안상훈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인을 부양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경험 많은 생산 인구로 활용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내수와 일자리의 선순환 구조를 위해선 단기적으로 가계부채 문제의 해소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경수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는 “집값 하락에 전전긍긍하지 않도록 자산을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자산 유동화)을 찾자”고 제안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금융사가 손실을 다 떠안을 수는 없기 때문에 가계도 일정 수준의 손실은 감수하겠다는 각오를 해야만 부채 문제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단기적으로 금융 부담을 줄여주고, 장기적으론 서비스업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 특별취재팀=서경호(팀장)·최지영·김영훈·김준술·장정훈·한애란·채승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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