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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살인·배신·욕정, 그 요양원에 무슨 일이 있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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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등단 12년 만에 첫 장편소설 『나프탈렌』을 낸 소설가 백가흠. 온갖 욕망에 들끓다가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우리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을 다뤘다. 그래서 더 슬프고 비극적이다. [중앙포토]

나프탈렌
백가흠 지음, 현대문학
308쪽, 1만3000원

겨우 남는 건 미미한 냄새 정도일까. 시간이 지나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나프탈렌의 휘발성은 가벼우면서도 쓸쓸하다. 하지만 조용히 자취를 감추는 그 나프탈렌이 삶의 사그라짐과 죽음의 소멸에 빗대어지자 섬뜩한 느낌을 불러온다.

 나프탈렌이란 이름을 단 백가흠의 첫 번째 장편소설에는 죽음이 산재해 있다. 이야기 곳곳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에 기인한다. 전주 인근의 만공산(滿空山)에 자리 잡은 하늘수련원. 몸과 마음이 병든, 그래서 죽음에 바짝 다가선 시한부의 삶을 사는 이들이 치료와 요양을 위해 찾은 곳이다.

 작가는 하늘수련원에 모여든 다양한 인간 군상을 하나씩 펼쳐 보인다. 황토방 5호실에 머무는 폐암환자인 이양자는 제자와 불륜에 빠진 남편 민진홍과 이혼 절차를 밟는다. 암이라는 육체적 고통에 더해 자신의 사랑과 희생을 무참히 짓밟은 남편에 대한 배신감에 시들어가지만 딸을 살려내겠다는 일념으로 무장한 엄마 김덕이의 지극정성 덕분에 기적처럼 살아난다. 하지만 정작 엄마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딸을 위해 이불 빨래까지 해놓은 채. 김덕이의 죽음은 딸과 맞바꾼 사랑 그 자체였다.

 황토방 6호실의 주인은 전직 교수 백용현이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그는 평생 죽음을 두려워하며 생에 강하게 집착했다. 욕정에 탐닉하며 살아온 것도 죽음이 무서워서였다. 조교인 공민지의 싱싱한 육체를 탐했지만 30년 만에 재회한 첫 번째 부인 손화자의 죽음 앞에 삶의 의미를 다시 깨닫곤 수련원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는다. 이미 결혼한 옛 애인과 육체적 관계를 끊지 못하는 공민지는 백용현의 고독과 방황을 노추가 아닌 삶의 근원적인 슬픔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된다.

 심지어 무간지옥 같은 삶은 배신과 음모로 뒤엉키며 살인으로 이어진다. 북한의 요덕수용소 간수 출신인 탈북자 최영래는 북한에 남은 아내와 딸을 탈출시키기 위해 ‘타짜’ 비슷한 사람을 끌어들여 도박판을 연 뒤 수련원 인부들의 돈을 갈취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일이 어그러지자 망설임 없이 살인까지 자행한다.

 나프탈렌처럼 흔적 없이 사라질 운명을 안고 있음에도 등장인물들은 모두 시답잖은 욕망에 사로잡혀 쩔쩔매는 노예와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이들을 얽매고 있는 욕망은 돈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육체적 욕망으로 구현되는가 하면, 가정을 파괴하고 관계를 무너뜨리는 소유욕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욕망 속에 허우적대는 이들은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갈팡질팡한다. 살인을 저지를 만큼 잔혹해지는 것도 그래서다.

 삶의 잔인함을 증폭시키는 것은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이다. 게다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 과장되거나 낯설지 않은,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문학평론가 김인환은 작품 해설에서 “삶은 누구에게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목적지도 모른 채, 자취 없이 사라질 운명을 안은 인간이 욕망의 덫에 얽매인 비극. 백가흠이 그려낸 삶은, 현실은 잔인하고 그래서 더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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