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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세상을 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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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경민]

가상공간을 의미하는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말은 1984년 윌리엄 깁슨이 쓴 과학소설(SF) 『뉴로맨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인공두뇌학을 의미하는 사이버네틱스와 공간을 뜻하는 스페이스의 합성어다. 이 소설에서 카우보이(해커와 같은 의미)인 주인공 케이스는 사이버 스페이스로 접속(잭인, 로그인과 비슷한 개념)하며 인공지능(AI)인 뉴로맨서를 추적한다. 실제 현실과 분리된 가상공간, 그곳에 존재하는 인공지능 같은 개념을 선보였다.

뉴로맨서 이후 89년 일본 시로 마사무네의 만화 ‘공각기동대’, 이를 바탕으로 95년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제작한 동명의 애니메이션, 99년 워쇼스키 형제가 감독한 영화 ‘매트릭스’ 등이 잇따라 나왔다. 공각기동대에서는 전자두뇌 이식이 보편화된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AI를 등장시켜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스스로를 인식하고, 기억과 판단력을 갖췄으되 육체가 없는 인격도 인간으로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매트릭스는 한발 더 나아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 자체가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허구일 수도 있지 않으냐고 묻는다.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미 사이버 스페이스는 우리 곁에 왔다.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가상의 공간에서 우리는 익명으로 또는 실명으로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 받고, 글과 사진을 공유하며, 물건을 주문한다. 수천 명이 한 서버에 접속하는 온라인 게임의 경우 나의 분신(아바타)인 캐릭터가 다른 사람과 협력해 괴물을 물리치거나, 적 진영의 캐릭터와 싸우고, 아이템을 줍거나 만들어 다른 사람과 거래한다. 심지어 게임 캐릭터나 아이템을 실제 돈을 받고 넘기기도 한다. 골치아픈 AI 문제가 없을 뿐, 가상공간은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돼 돌아가는 것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컴퓨터와 통신이라는 두 가지 축으로 굴러간다. 46년 미국에서 1만8000개의 진공관이 달린 전자계산기 ‘에니악(ENIAC)’이 개발되면서 컴퓨터의 시대가 열렸다. 69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LA캠퍼스(UCLA)에서 컴퓨터 간 통신망인 아르파넷(ARPANET)을 통해 600㎞ 떨어진 스탠퍼드대연구소(SRI)에 메시지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아르파넷은 인터넷으로 발전했고, 이 프로젝트를 이끌어 간 빈트 서프는 ‘인터넷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상거래도 혁명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94년 제프 베조스가 설립한 아마존은 처음에는 도서 판매에서 시작해 점차 컴퓨터·소프트웨어·전자제품·의류까지 취급하는 종합 온라인 쇼핑몰로 성장했다. 이듬해인 95년에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란계 미국인인 피에르 오미드야르가 세운 온라인 경매사이트 이베이가 선을 보였다.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미국의 전자상거래 시장 규모는 1770억 달러(128조원)에 달한다. 중국은 740억 달러(82조원)나 매년 20% 이상 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온라인쇼핑 규모는 올해 35조~45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인터넷이 생활의 일부가 된 데는 통신의 발달이 큰 역할을 했다. 초기의 인터넷은 전화선으로 연결됐지만 케이블과 ADSL을 거쳐 2000년대 이후에는 광케이블을 통한 100Mbps급 초고속인터넷이 일반화됐다. 1분 남짓이면 CD 한 장 분량의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통신망의 발전은 인터넷의 용도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 초기의 느린 망으로는 문자로 된 편지를 전송하거나 게시판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진을 공유하고 실시간 동영상까지 무리 없이 볼 수 있게 됐다. 2005년 서비스를 시작한 유튜브에는 지금도 분당 72시간 분량의 동영상이 올라온다.

최근에는 무선통신망의 발달로 선조차 필요없이 언제 어디서나 사이버 스페이스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4세대(4G) 이동통신망인 롱텀에볼루션(LTE)은 웬만한 유선망 못지 않게 빠른 데이터 전송 속도를 자랑한다. 유선을 기반으로 한 페이스북이 상장 후 주가가 반토막이 나는 등 고전하는 반면 카카오톡, 네이버 라인 같은 무선 기반의 서비스가 순식간에 각각 6000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끌어모으며 승승장구하는 것도 모바일 시대의 개막과 맥을 같이한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무선통신과 스마트기기의 결합이 갈수록 강력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가톨릭대 서효중 컴퓨터정보공학부 교수는 “머지않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는 손목시계 크기의 ‘개인용 종합통신 단말기’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클라우드’로 불리는 인터넷상의 사이버 스페이스에 데이터와 응용프래그램을 올려놓고 실시간으로 원하는 정보를 불러들여 활용하는 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불러온 정보는 이동할 때는 안경, 자리에 않으면 모니터, 집에 들어가면 TV 화면을 통해 보고 들을 수 있게 된다. 자동차용 블랙박스에 영상을 저장하듯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정보가 사이버 스페이스에 차곡차곡 쌓이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즈음이면 ‘현실의 나’와 ‘가상공간의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될 수도 있을 법하다.

김창우 기자
일러스트=박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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