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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이 경쟁력이다] 5개 극장 갖춘 밀양 연극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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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 지난 14일 경남 밀양 연극촌에서 공연된 동요 뮤지컬 '푸른하늘 은하수'의 한 장면. 200여석의 객석이 관객들로 꽉 찼다.송봉근 기자

지난 14일 오후 경남 밀양시 부북면 가산리 밀양연극촌 창고극장. 동요 뮤지컬 '푸른하늘 은하수'를 보러 온 관객들이 200여석의 좌석을 가득 채웠다. 조립식 패널로 지어진 극장안은 무더웠지만 관객들은 어린 배우들이 부르는 동요를 따라 부르고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무대와 객석이 어느덧 혼연일체가 됐다. 밀양연극촌이 공연예술의 메카로 뜨고 있다. '특별한' 주말 체험을 하려는 가족과 연인들로 연극촌이 붐비고 있다. 농촌에 관객이 몰리면서 경기가 살아나고 지역문화 수준도 높이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 먹고 자면서 보는 연극=전국 곳곳에서 연극축제가 일정기간 동안 열리고 있지만 밀양 연극촌에서는 거의 매주 토요일 공연을 한다. 1999년 10월 개관 기념작 '일식'을 시작으로 해마다 10여편의 작품이 50여 차례 공연되고 있다. 작품도 계절과 관객 규모에 맞춰 실내외 무대를 오가며 공연된다. 연극촌에는 스튜디오 극장(150석)과 창고극장(150석),우리동네 극장(250석),연극 실험실(90석)등 4개의 실내극장이 있다.야외인 숲의극장(500석)이 가장 크다. 관객들은 허름한 창고극장에서 펼쳐지는 연극과 여름철 별이 쏟아지는 야외무대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대도시 소극장들도 주말 상설 공연이 어려운 현실에서 한적한 농촌 폐교를 개조한 곳에 주말마다 수백명의 관객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 비결은 관객들이 공연을 본 뒤 하루를 묵으면서 연극과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 때문이다.

◆ 양반고을 속 광대촌=경남 밀양은 양반고을이다. 유학자를 많이 배출한 경북 안동에서도 '소(小)안동'이라고 부르는 이곳에 광대촌이 자리잡기에는 밀양시의 지원과 연극촌을 운영하는 극단 '연희단 거리패'의 현지화 전략이 주효했다.

밀양 연극촌은 99년 6월 이상조 밀양시장이 밀양 출신 연극인 손숙(61.현 밀양연극촌 이사장)씨를 만나 밀양을 문화예술관광도시로 탈바꿈 시킬 방안을 찾으면서 시작됐다. 손씨는 지방에 연극 기지(基地)를 구축하려는 당시 연희단 거리패 이윤택(53.현 국립극단 예술감독)대표에게 밀양행을 권했고, 이씨가 60여명의 단원을 이끌고 그해 9월 폐교에 둥지를 틀었다.

이들은 지역 주민을 출연 배우로 과감하게 기용했다. 14일 공연된 '푸른하늘 은하수'의 출연자 23명 중 15명이 밀양지역 초등학생들과 주부였다. 60살 이상 노인은 무료인 데다 초대권도 많이 돌린다. 지역 출신 연기자들이 많자 지역 관객도 덩달아 늘어나고 있다.14일 꽃을 한송이씩 들고 찾아 온 조현진(11.여.밀주초등 2년)양은 "친구가 출연하는 모습을 보려고 12명이 함께 왔다"고 말했다.

밀양시도 폐교의 임대료를 교육청에 대신 지불하고 있다. 해마다 7,8월에 10여일 동안 열리는 '여름 공연축제'에 2002년 2000만원을 시작으로 2003년 6000만원,2004년 1억원을 지원하는 등 지원도 늘리고 있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일부 시설이 파손되자 국비 등 4억여원을 지원받아 250석 규모의 우리동네 극장을 지어주기도 했다.

◆ 농촌경제 효자=연극촌 입구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설원주(75)씨는 공연이 있는 날이면 껑충 뛰는 매출에 즐거운 비명이다. 그는 "여름축제때는 하루 매출이 평소 2배인 100여 만원까지 올라간다"라고 자랑했다.

지난해 여름공연축제에는 2만여명의 관객들이 찾았다.수입이 늘어난 택시기사들이 즐거워하고 식당과 숙박업소도 손님들로 붐빈다. 인구 12만명의 소도시에 20% 가까운 외지인이 몰려오는 것이다.

연희단 거리패가 밀양과 대도시 공연을 통해 올리는 연 매출은 10억여원.이 중에 단원들의 개런티로 3억여원이 밀양에 뿌려진다.

◆ 연극촌 즐기기=밀양 연극촌에서는 멀게만 느껴졌던 연극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많다. 일반인도 조그만 노력하면 단역 배우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길까지 열려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주말체험이다.토요일 저녁 연극을 본 뒤 배우들과 하루를 묵으면서 뒤풀이를 통해 연극제작과정에 얽힌 뒷얘기를 듣는다. 이날에는 간단한 연기연습과 연극관련 특강에 참가한다.

좀 더 배우고 싶다면 7박8일짜리 워크숍에 참가할 수 있다. 기초와 전문과정으로 나눠 진행된다. 워크숍 기간 중에 15편의 연극을 관람하면서 이윤택 감독과 하용부 촌장 등으로부터 연기법을 배운다.

방학 중에는 어린이 연극 캠프도 열린다. 발성법과 호흡법, 무대 동작 등을 배우기 때문에 자신감을 심어준다. 모든 참가 어린이들은 캠프가 끝나는 날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해마다 7,8월에 10여일 동안 열리는 연극축제 기간에는 2박3일, 4박5일 등 다양한 연극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밀양=김상진 기자

***'연희단 패거리' 정동숙 대표

"단원들을 이끌고 서울서 밀양으로 내려올 때 지방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한 것이 들어 맞는 것 같아요."

밀양 연극촌을 운영하는 극단 '연희단 거리패' 정동숙(39.여.사진) 대표. 그는 1999년 9월 당시 이윤택 감독과 하용부(51) 부대표 등을 도와 밀양으로 왔다.

"극단이 커지면서 단원들의 숙소도 모자라고 연습공간과 자료 보관장소도 마땅찮아 고민하던 중 밀양시의 제안을 받고'이거다' 싶더라구요."

이윤택 감독이 지난해 초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옮겨 간 뒤 연희단 거리패 대표를 맡아 연극촌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작품을 지휘하고 있다.

그는 국내 처음으로 15년째 장기 공연기록을 세운 연희단거리패의 출세작 '오구-죽음의 형식'에서 뻔뻔한 신세대 박수무당역을 맡아 관객의 배꼽을 잡게 한 간판급 배우다. 전통춤과 테크노 몸짓을 접목한 팔자춤, 노래와 재담 솜씨까지 뛰어난 개성파 연기인이다.

그는 "밀양과 관련있는 연극인들의 지원과 자치단체의 후원 등이 합쳐 연극촌이 빨리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밀양에서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는 국립극단 이 감독이 틈만 나면 밀양에 와 후배를 지도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단다.

정 대표는 부산여전 전자계산학과를 다닐 때 연극과 인연을 맺었다. 연극동아리 활동을 하며 공연장만 찾아다니다 부산의 가마골 소극장에서 본격적으로 연기공부를 했다. 95년 '산너머 개똥아'에서 1인 다역으로 현대 연극제 여자연기상을 수상했다.

관객서 배우 된 '엄마와 세 자매'

▶ 연극가족인 엄마 김미영씨, 큰딸 박수진, 둘째딸 효진, 세째딸 유진양(위로부터)이 공연에 앞서 창고극장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경남 밀양시 가곡동에 사는 주부 김미영(38)씨와 딸 박수진(14.중 1).효진(12.초등6년).유진(10.초등3년) 양 등 일가족 네명은 밀양 연극촌의 인기 배우들이다.

'세 자매와 엄마'로 통하는 이들은 밀양 연극촌에서 지난 7, 14일 공연한 동요 뮤지컬 '푸른하늘 은하수'에서 열연을 했다. 세딸은 폐교를 막기 위해 열린 동요대회에 나가는 초등학생들로 등장하고 김씨는 시골아낙 역으로 무대에 섰다. 이들의 연기는 지난 2월 서울 대학로 게릴라 극장에서 열흘간 열린 '한국동요 80년사 기념공연'에 참가할 정도로 수준급이다.

이들 가족은 지금은 배우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관객이었다. 연극촌이 문을 연 이듬해인 2000년 4월 '산너머 개똥아'라는 연극을 처음 본 뒤 연극의 매력에 푹 빠져 주말마다 연극촌을 찾았다.

세딸은 올해 초 연극촌의 어린이 연극 캠프를 수료한 뒤 무대에 서기 시작했고, 김씨도 연기교육을 받고 무대에 섰다. 연극을 한 뒤 가족들의 생활은 활기로 넘쳐 난다고 한다. 노래 한곡 못하던 김씨는 이젠 안 시켜 줘서 못할 만큼 매사에 자신감을 얻었다. 내성적이던 세딸들도 발표력이 뛰어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집안도 화목해졌다. 연극을 모르던 시어머니(71)는 "손녀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게 너무 예쁘다"며 김씨 손을 잡고 주말마다 연극촌을 찾는다. 카 센터를 하는 남편(42)도 틈만 나면 부인과 딸들의 연기를 본 뒤 부족한 점을 지적해 준다.

김씨는 "수줍음 많은 시골아이들이 대사.동작.춤.노래 등을 익히면서 자신감과 창의력을 얻는 과정이 대견스럽다. 연출가에게 부탁해서 시어머니와 남편까지 함께 무대에 서 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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