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안정감은 毒, 파티장 같은 무대 만들고파”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중국의 곤극(昆劇) 배우 장쥔(37·張軍·사진)에게 전통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현재다. 그는 잊혀져 가던 중국의 전통 연극 형식인 ‘곤극’을 되살리기 위해 15년째 고군분투해 왔다. 곤극은 14세기에 시작된 중국 전통 연극의 원류로, 노래·대사·춤 등 다양한 요소를 결합한 종합예술이다. 중국 남부 곤산(昆山) 지방에서 시작됐기에 곤극이라고 불린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경극(京劇)은 19세기 무렵 베이징(北京)에서 시작됐다. 장쥔은 “곤극은 중국 연극의 뿌리”라고 말한다. 역동적 서사성이 특징인 경극과 달리 곤극은 우아한 서정성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문제는 곤극의 서정성이 경극의 역동성에 밀렸다는데 있다. 총 공연 시간이 20시간을 훌쩍 넘기는 터라 몇 일간 장기 공연해야 하는 곤극의 형식도 걸림돌이 됐다. 귀족을 위한 정제된 세련미를 중심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에서도 멀어져 갔다. 급기야 20세기 들어선 무대에서 찾기 힘든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1950년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곤극을 재조명하면서 부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열두 살 무렵 우연히 곤극을 접하고 그 매력에 빠진 장쥔은 곤극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싶었다고 한다. 8년의 곤극 배우 수련 과정을 마치고 정식 배우로 인정받을 무렵부터 그는 곤극의 부활을 일생의 과제로 삼았다. 첫걸음은 98년 시작한 ‘젊은이를 위한 곤극’ 프로젝트였다. 벌써 14년째다. 자신이 나고 자란 상하이(上海) 인근 대학교를 돌며 곤극 무료 공연을 시작했다.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텅 빈 객석을 보는 건 괴로웠다. 궁리 끝에 현대적 요소를 가미해 새로운 ‘21세기형 곤극’을 만들어냈다. 재즈·랩과 같은 현대음악의 요소를 가미해 젊은 층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각색을 통해 공연 시간을 3시간 내외로 압축하며 극의 긴장감을 높였다.

그러면서 서서히 곤극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2001년 유네스코는 곤극을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공연도 탄력을 받았다. 장쥔은 지난해 유네스코로부터 ‘평화를 위한 예술인’으로 선정됐다.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당시 “세계 무형문화유산인 곤극을 지키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온 공로를 인정하는 의미”라고 선정 배경을 설명했다. CNN은 지난해 그를 인터뷰하면서 ‘곤극의 왕자’라고 소개했다.

지난주 제3회 문화소통포럼(CCF) 참가차 서울을 찾은 그는 “한국에서도 곤극을 펼쳐보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CCF는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이사장 최정화)이 한국 문화 전파를 위해 세계 각지의 문화계 인사 및 오피니언 리더를 초청하는 연례행사다. 올해는 국립중앙박물관·리움미술관·국립극장 등을 돌며 한국 문화의 세계화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번이 첫 방한이라는 장쥔은 특히 ‘수궁가’ 판소리 공연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소감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본격 체험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중국에서 한류(韓流)가 유행하기 전인 90년대 초반부터 한국 대중문화를 좋아했다. H.O.T가 해체됐을 땐 굉장히 슬퍼했을 정도니까(웃음). 지금도 전지현씨 등 여러 한류 배우의 팬이다. 그러나 한국 전통문화는 생소하다. 중국의 곤극처럼 한국 전통문화 역시 외면 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번에 감상한 ‘수궁가’ 같은 판소리 문화는 정말로 흥미로웠다. 한국의 전통문화도 현대적 요소를 가미한다면 잠재력이 상당할 듯하다. 아무도 곤극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시절 척박한 환경과 냉담한 반응에 힘들 때가 많았지만 곤극의 위대함을 되새기며 이겨냈다. 중요한 건 현대적 요소를 가미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통예술인에겐 과거와 현재의 접점을 찾아내야 할 의무가 있다.”

-한국의 판소리도 젊은 소리꾼 이자람씨가 ‘억척가’라는 창작공연에서 1인15역을 하는 등 다양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그런 젊은 전통문화 예술인과 함께 국경을 뛰어 넘는 공연을 해보고 싶다. 실제로 일본의 전통공연인 가부키(歌舞伎) 배우들과도 함께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어디 가서 뭘 보더라도 ‘이걸 곤극에 이렇게 적용해 보면 어떨까’ 고민한다. 모든 세대가 와서 즐길 수 있는 ‘파티장’ 같은 무대를 만드는 게 내 목표다. 이렇게 항상 고민하지 않으면 전통은 외면 받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장쥔은 다양한 장르를 접목하는 시도를 계속했다. 유네스코 ‘평화를 위한 예술인’ 선정 축하공연에서도 전통 분장 대신 턱시도 차림으로 나타나 뉴에이지풍으로 편곡한 곤극 노래를 불렀다. 영화 ‘와호장룡’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탄둔(譚盾) 음악감독은 “600년 된 예술 곤극을 현대 감성으로 풀어내려면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열린 자세와 자신감까지 갖추어야 한다”며 장쥔을 치켜세웠다.

탄둔 감독과 장쥔이 함께 무대에 올리는 곤극의 대표작 ‘모란정’은 이달로 공연 100회를 맞는다. 명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곤극은 유생과 부잣집 딸의 사랑 이야기다. 원래 공연시간은 20시간이 넘는 대작이지만 장쥔은 3시간으로 줄이고 무대장치부터 음악, 극의 흐름까지 현대 감각에 맞췄다. 그러면서도 곤극의 핵심 스토리와 분장 등의 요소를 고수해 전통을 재탄생시켰다고 한다. 재즈·뉴에이지·랩을 접목한 ‘곤극 콘서트’ 시리즈 또한 그의 히트작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2009년엔 아예 상하이곤극단 부단장 자리도 마다하고 자기 이름을 내건 곤극단을 만들었다.
-독립 극단을 만들게 된 계기는.
“‘모란정’을 자유롭게 개작해 거기에 매진하는 나만의 극단을 만들고 싶었다. 물론 안정성은 훨씬 떨어진다. 재정적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예술가에게 안정성은 독이다. 난 안정된 생활이 불편하고 답답하다. 나를 옥죄는 것 같기 때문이다. 힘들더라도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펼치고 싶은 생각에 극단을 꾸렸다. 후회? 전혀 없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